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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핀 뽑자 '펑' 열린 문…불법 중국어선 잡는 해경 신무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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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테러복을 입은 한 남성이 둥그스름한 모양을 한 장비의 뚜껑을 연 뒤 흑색 섬광탄을 집어넣었다. 섬광탄이 장비 안으로 쏙 들어가자 남성은 다시 뚜껑을 돌려 단단히 봉인했다. 이어 굳게 닫힌 철문으로 다가가 문틈에 장비를 부착하고, 한 차례 숨을 들이쉰 뒤 섬광탄 우측에 달린 안전핀을 뽑았다. 남성이 다섯보 뒤로 물러서고 3초 뒤 ‘펑’ 소리와 함께 섬광탄에서 가스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꿈쩍도 않을 것 같던 두꺼운 철문이 활짝 열렸다. 분출된 가스가 피스톤 운동을 하듯 문을 열어 젖힌 것이다. 철문이 열리기까지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난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1층 로비에서 재생된 ‘출입문 신속 개방 장비’시연 영상 속 한 장면이다. 영상 재생이 끝나자 장비를 개발한 부산해양경찰서 소속 이덕규(42) 경사가 마이크를 잡았다. 이 경사는 “출입문 개방은 불법 조업을 하는 외국 어선 추격은 물론, 다중이용시설 테러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출발점”이라며 “이 장비는 어느 조건에서도 빨리 문을 열 수 있는 휴대용 발명품”이라고 말했다.

작전 성패 좌우하는 출입문 개방

해경은 중국어선 단속 시 조타실 문을 개방하기 위해 주로 훌리건툴을 사용하고 있다. 사진 서해5도 특별경비단

해경은 중국어선 단속 시 조타실 문을 개방하기 위해 주로 훌리건툴을 사용하고 있다. 사진 서해5도 특별경비단

출입문 개방은 중국 어선의 불법 조업을 단속하는데 있어 핵심적인 과정이다. 통상 중국어선은 불법 조업 행위가 해경에 적발되면 서해 북방한계선(NLL) 북측 수역이나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달아난다. NLL 북측 수역으로 넘어가면 해경이 더는 쫓을 수 없고, EEZ에선 대규모 선단 사이로 숨어들거나 중국 해경 개입 등의 변수를 통해 단속을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 해경은 도어 램(금속봉), 훌리건 툴(쇠 지렛대), 전기톱 등을 총동원, 신속한 출입문 개방에 사활을 건다. 빠르게 조타실 문을 개방해 엔진을 정지시켜야 도주를 막을 수 있어서다.

중국어선들은 선박 양쪽에 쇠창살을 달아 해경의 등선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진 서해5도 특별경비단

중국어선들은 선박 양쪽에 쇠창살을 달아 해경의 등선을 방해하기도 한다. 사진 서해5도 특별경비단

하지만 현재 사용하는 장비는 무게가 많이 나가 소지하기 힘들고 단박에 개방이 어려운데다(도어 램), 여러 형태 출입문에 적용하기 어렵다(훌리건 툴). 한계가 뚜렷했던 것이다. 자연스레 “육상과 수상에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장비가 필요하다(서해5도특별경비단 근무자)”는 지적이 나왔고, 서해에서 중국어선을 단속한 경험이 있는 이 경사도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이 경사가 개발한 출입문 신속 개방 장비는 세 부분으로 구성돼있다. 섬광폭음탄을 장비에 넣어서 문 강제 개방을 위한 원동력으로 삼는 방식이다. 사진 이덕규 경사

이 경사가 개발한 출입문 신속 개방 장비는 세 부분으로 구성돼있다. 섬광폭음탄을 장비에 넣어서 문 강제 개방을 위한 원동력으로 삼는 방식이다. 사진 이덕규 경사

이에 따라 이 경사는 지난해 초 개발을 시작, 1년여간의 연구 끝에 중량 1㎏, 지름 6.5㎝, 높이 12㎝인 출입문 신속개방장치를 만들었다. 가스전달 속도가 시속 1080㎞(300m/s)이고 압력 충전 속도가 0.06초인 섬광폭음 탄의 폭발력으로 문을 개방하는 원리다. 당기는 문을 갖춘 50t급 어선과 미닫이문과 강화아크릴 창문을 설치한 20t급 어선에 모두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섬광탄은 산소가 없어도 폭발시킬 수 있기 때문에 수중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7년간 해경특공대에서 휴대용 방폭 장비(2018), 방검부력조끼(2019년), 레스큐 펜(2020년), 와이어 절단 장비(2021년), 스턴로프 발사기(2022년) 등을 개발해 특허등록까지 한 경험이 신속개방장치 개발의 밑거름이 됐다”고 이 경사는 말했다.

이덕규 경사(오른쪽)가 시제품 제조업체 관계자, 변리사와 출입문 신속 개방 장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3D설계 도면에 따라 제품이 나왔는지 확인하고 있다. 사진 이덕규 경사

이덕규 경사(오른쪽)가 시제품 제조업체 관계자, 변리사와 출입문 신속 개방 장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3D설계 도면에 따라 제품이 나왔는지 확인하고 있다. 사진 이덕규 경사

개발 이후 두 차례 실험을 통과한 이 경사의 발명품은 최근 상용화를 위해 전투장비 제조업체와 세부 협의에 들어갔다. 국유특허 취득을 위한 절차도 진행중이다. 제조업체 관계자는 “구조와 단속에 있어 신속한 통로개척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보완을 거쳐 대량생산이 이뤄지면 여러 분야에서 작전 성공률을 높일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덕규 경사는 제6회 국민안전발명챌린지에서 국회의장상(공무원 부문 대상)을 받았다. 사진 해양경찰청

이덕규 경사는 제6회 국민안전발명챌린지에서 국회의장상(공무원 부문 대상)을 받았다. 사진 해양경찰청

이 경사는 새 발명품덕에 지난 24일 열린 ‘제6회 국민안전발명챌린지’에서 국회의장상(공무원 부문 대상)도 수상했다. 재난·재해, 사건·사고에 대응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발굴하기 위해 경찰청·소방청·해양경찰청·관세청·특허청이 매년 여는 공모전이다. 우수한 발명품들은 지식재산권화를 거쳐 상용화된다. 이 경사는 “개선점을 보완해 현장에서 구조와 단속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장비를 완성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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