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ELS’ 수조원대 손실 우려, 불완전판매 리스크 여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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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호 12면

라임·옵티머스 사태 그후 4년

홍콩항생중국기업지수(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주가연계증권(ELS)에서 수조원대 원금 손실이 예상되면서 ‘라임·옵티머스 사태’를 넘어서는 분쟁이 발생할 우려가 커지고 있다. 라임·옵티머스 사태는 2019년 라임자산운용의 부실 관리와 2020년 옵티머스자산운용의 사기 행각으로 펀드에 들어 있던 주식 가격이 폭락한 역대급 규모의 펀드 사기 사건이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투자자에게 원금 손실 가능성 등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 ‘불완전판매’의 대명사가 됐다. 투자자들은 모두 2조원대의 손실을 입었고, 금융위원회는 최근 불완전판매와 관련 펀드를 판매했던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들에게 중징계를 내렸다. 2조원대의 불완전판매로 나라 전체가 떠들썩했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달라진 게 거의 없다. 금융권은 최근 다시 불완전판매 리스크에 직면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홍콩 H지수 관련 원금 손실 위험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투자자들은 “홍콩이 망하지 않는 한 수익이 보장되는 상품이라고 안내했다” “예금처럼 안전한 상품인 것처럼 설명했다”며 벌써부터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내년 상반기에만 최대 3조원의 역대급 손실이 가시화되면서 거센 후폭풍이 예고된 상태다. 윤한홍 국민의힘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홍콩 H지수 관련 ELS 판매 잔액은 20조5000억원에 달한다. 이중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이 판매한 ELS에서 내년 상반기에 만기 도래하는 상품 규모만 8조4100억원으로 집계됐다.

ELS의 만기는 통상 3년으로, 2021년 저금리 당시 은행 예금보다 연 2% 가량 높은 수익률을 내세워 인기몰이를 했다. ELS는 기초자산 가격이 만기 때까지 계약 시점을 기준으로 일정 범위에서 움직이면 약속한 수익을 주는 파생 상품이다. 반대로 정해진 기준을 벗어나면 원금 손실이 발생한다. 2021년 상반기 1만2000선을 넘었던 홍콩 H지수는 12월 1일 기준 5761.73까지 떨어진 상태다. 최근 중국 경기 둔화와 미·중 분쟁 등의 영향으로 2년 여 전에 비해 절반 아래로 급락했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부회장은 “예금만큼 안전하다고 해서 노후자금을 ELS에 넣었는데, 현재 상품 평가액이 원금의 절반에 불과하다는 통보를 받고 망연자실한 투자자들의 민원이 빗발치고 있다”고 말했다.

대규모 불완전판매 의혹이 제기됨에 따라 금융당국도 전수조사에 나섰다.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20일부터 최대 판매기관인 국민은행의 현장조사에 착수했으며, 미래에셋증권과 KB증권 등 다른 판매사 5~6곳도 조사대상에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라임·옵티머스 사태 이후 고위험 상품에 대한 관리·감독 문제가 제기되자 투자자보호 제도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바 있다. 그 결과 2021년 3월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이 시행됐다. 금소법은 금융투자상품 판매 시 ▶설명 의무 ▶적합성 ▶적정성 ▶불공정영업행위 금지 ▶부당권유행위 금지 ▶허위·과장광고 금지 등을 의무 규정으로 명시하고 있다.

금소법 제정은 금융소비자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한 큰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어째서 또다시 대규모 불완전판매 의혹이 불거지고 있는 걸까. 전문가들은 2021년 시행된 금소법이 실질적인 투자자 보호와 금융권의 판매 관행 개선에는 여전히 미흡한 부분이 많다고 지적한다. 금감원에 따르면, 분쟁 민원은 2018년 2만8118건에서 지난해 3만6508건으로 30%나 늘었다. 최근 5년간 펀드·신탁, 보험 등의 불완전판매 금액만도 6조원에 달한다. 특히 은행권의 불완전판매 규모가 크다. 국회 정무위원회 윤영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 8월까지 은행권의 불완전 판매 금액은 3조6270억원으로 피해자는 1만9692명에 이른다. 사모펀드 불완전판매와 설명의무 위반 등이 주된 제재 사례로 꼽혔다.

이처럼 관련 제도 정비 이후에도 불완전판매가 끊이지 않자 일각에선 은행의 고위험 파생상품 판매 금지 등의 규제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2019년 라임·옵티머스 사태 이후 당국은 시중은행의 고위험 투자상품 판매를 금지하는 대책을 마련한 바 있지만, “40조원 이상 규모의 신탁 시장을 잃게 된다”는 은행 측의 반발에 따라 제한적 판매를 허용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통상 은행에선 안정적인 수익을 제공받을 수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만큼, 은행에서 파생상품 등의 고위험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적절한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김경록 미래에셋자산운용 고문도 “예금보다 고작 2%포인트 정도 높은 수익을 추구하는 대신 원금 절반도 날아갈 수 있는 상품이라는 것을 투자자들이 알았다면, 노후자금의 전부를 넣었다는 식의 과감한 투자가 이뤄지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내년 ELS 손실이 확정될 경우 단순 투자 위험에 따른 손실이냐, 불완전판매로 인한 피해냐를 다투게 될 전망이다. 앞선 2019~2020년 라임·옵티머스 불완전판매와 관련해선 40~80%, 최대 100%까지 금융사의 배상이 이뤄지기도 했다. 다만 금융사들은 금소법 시행 이후 상품판매 과정에서 녹취 등 다양한 내부통제 절차를 준수한 만큼 불완전판매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법무법인 세종의 김진우 변호사는 “금융상품의 투자에 따르는 이익과 손실의 책임은 투자자에게 있지만, ELS의 위험성에 관한 설명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면 설명의무 위반에 따른 손해배상 책임이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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