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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중 숨진 선배 지금도 극장 온다…김혜수도 기립박수 친 연극의 비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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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7호 18면

[비욘드 스테이지]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주역 하성광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포스터 앞에 선 하성광. 최영재 기자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포스터 앞에 선 하성광. 최영재 기자

복수극의 미덕은 카타르시스다. 그런데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상한 복수극이 있다. 국립극단의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인데, 대박이 났다. 2015년 스타 연출가 고선웅이 ‘동양의 햄릿’이라 불리는 중국 고전 『조씨고아』를 각색해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동아연극상·대한민국연극대상을 휩쓸었고, 8년이 지난 지금도 공연되고 있다. 지난달 30일 개막한 6번째 시즌도 유료회원 선예매 당일 이미 전석 매진됐고, 개막일엔 배우 김혜수가 보러와 기립박수를 한참 쳤다.

2일 순수연극으로선 이례적으로 서울 공연 누적 100회를 달성하는데, 일등 공신은 배우 하성광(53)이다. 권력에 눈먼 대장군 도안고에게 멸문지화를 당한 조씨가문의 씨앗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귀한 혈육을 희생양으로 바치고 20년 후 복수에 나서는 필부 ‘정영’인데, 동아연극상과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을 받은 ‘동양의 햄릿’이 바로 그다. 지방·해외공연까지 150여 차례 공연에 한 번도 빠지지 않은 ‘조씨고아의 대명사’다.

최근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그는 “1995년 데뷔 이래 한 작품을 이렇게 오래 한 건 처음”이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생명력이요? 작품도 좋지만 연극 하면서 이런 팀 분위기는 처음이에요. 팀의 에너지란 게 있거든요. 관객들도 우리가 분장실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일 겁니다. 배우들끼리 마음이 모아진다는 게 엄청난 힘인데, 큰 복을 받은 거죠.”

꽃길만 걸은 건 아니다. 끈끈한 결속력은 예상치 못한 역경들을 함께 헤치며 생겼다. 초연 당시 폐막을 앞두고 최고참 임홍식 배우가 숨진 일이 대표적이다. “1막 엔딩 무렵 당신 분량을 다 마치고 이동하시다 쓰러지셨어요. 좀 힘들어 보이시긴 했지만 그렇게 가실 줄은 아무도 몰랐죠. 마지막 3회는 다른 역 배우가 새벽까지 저와 대사를 맞춰 멀티로 소화했는데, 선배님이 남겨준 숙제가 크나큰 접착제가 된 것 같아요. 지금도 같이 계신다고 느껴요. 공연 전에 늘 선배님과 대화하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연습한 대로 잘할 수 있게 함께 있어 달라고요.”

정영에 빙의한 듯 연기하는 하성광. [사진 국립극단]

정영에 빙의한 듯 연기하는 하성광. [사진 국립극단]

이듬해 중국 공연 때는 마침 사드 이슈가 터졌다. 공연 날까지 의상·소품 반입을 못해 현지 극장 소품창고를 뒤져야 했다. “먼지가 켜켜이 쌓인 왕관, 칼 등이 나오더군요. 아동극 소품들 같았는데, 우린 심각하게 생각 안했어요. 의상이 없으면 츄리닝을 뒤집어 입자고 할 정도로 작품의 힘을 믿었던 거죠. 다행히 공연 직전 소품이 와서 정신없이 시작했는데, 중국 관객들은 막이 올라도 돌아다니고 통화도 편하게 하세요. 15분쯤 지나 조용해지더니, 기립박수 치느라 집에 가질 않더군요. 중국에선 춘향전 같은 작품이라는데, 뭐 이런 게 있나 놀랐던 거죠.”

‘동양의 햄릿’은 서양의 햄릿과는 결이 다르다. 복수로 인해 또다시 되풀이되는 희생을 목도하고, 인생의 허무까지 나아가기에 후련함 대신 먹먹함을 준다. “복수 이후를 보여주잖아요. 복수의 칼을 간 20년 끝에 남은 가치가 뭘까. 복수를 당하는 쪽에선 과연 온당한가. 그런 질문을 관객에게 돌리는 거죠. ‘어떠세요. 잘한 건지 잘못된 건지 집에 가시면서 생각 한번 해보시죠’라고.”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모습. [사진 국립극단]

연극 '조씨고아, 복수의 씨앗' 공연 모습. [사진 국립극단]

‘하성광이 정영을 연기했다기보다 정영이 하성광에게 들어왔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초연 당시 한 평론가의 감상평이다. 하성광은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며 겸연쩍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 무조건 호감 가는 사람 있잖아요. 대본을 볼 때도 그런 게 있는데, 정영이 딱 그랬어요. 제안받을 때 주인공 아버지라고 들었는데, 알고 보니 주인공이더군요. 내심 좋으면서 부담도 되고, 감당해 내기 위해 엄청 열심히 했죠. 근데 세월이 지나면서 욕심을 좀 버리게 됐어요. 애쓰다가 잃게 되는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돼서, 넘치지 않게 절제하려고 해요.”

‘조씨고아’의 미덕도 ‘절제’에 있다. 복수극이라고 시종 비장한 게 아니다. 러닝타임 150분중 120분 정도는 유머러스하고 리드미컬한 ‘고선웅 스타일’ 자체다. 연기의 관건은 ‘애이불비(哀而不悲). 속으론 슬프면서도 슬퍼 보이지는 않되 관객은 슬픔을 느껴야 하는 최고난도의 연기다. 보잘것 없는 필부 정영이 커튼콜에 영웅처럼 보이는 이유다. “연극은 굿이라지만, 특히 고선웅 연극은 제 고향 진도에서 하는 다시래기 같아요. 죽음이 옆에 있지만 농담도 하면서 삶을 살아야 하는 것과 비슷한데, 내재된 슬픔을 놓치면 삶도 공허해지고 공연도 망치는 거죠. 그래서 고선웅 연극이 제일 힘들어요.(웃음)”

진도를 떠나 무작정 대학로를 찾기까지 연극을 본 적도 없었지만, 잠재의식 속에 늘 배우를 동경했었다. 20년 무명 생활도 힘들지 않게 버틴 이유다. 롤 모델로 꼽는 기국서 연출에게 ‘연기 못한다’고 엄청 혼이 났던 2006년 ‘리어왕’의 에드거 역이 큰 장벽이었지만, 결국 그에게 서울연극제 신인상을 안기며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난해하게 말씀하시는 스타일이라 못 알아들었거든요. ‘찰싹 달라붙어서 해봐. 배우는 비굴을 즐기는 거야’ 이런 말들이 굉장한 숙제였어요. 3년쯤 지나고 나니 인물에게 붙으라는 소린 줄 알겠더군요. 많이 혼났지만, 그런 광기어린 연출은 다시 없을 것 같아서 존경해요. 연극이 세상에 말할 수 있는 힘을 믿고 평생 연극만 하신 분이거든요. 3년 전에 사뮈엘 베케트의 ‘엔드게임’을 할 때는 믿고 맡겨주시더군요. 한국에서 인기 없는 작품인데 만석이 되기도 해서, 저로선 꽤 뿌듯했죠.”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배우 하성광. 최영재 기자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난 배우 하성광. 최영재 기자

배우에게 매체 구분이 무색해진 시대다. 그 또한 드라마 ‘비밀의 숲’ ‘며느라기’ 등에서 씬스틸러로 주목받았지만, “난 천상 연극배우”란다. “연극은 한 호흡이라 흐름 위에 나를 올려놓기만 하면 되는데, 영상은 이어붙이기라 순간 집중력이 필요하죠. 근데 저는 촬영장에서 남들처럼 잡담도 못하고 대사 외우면서 계속 호흡을 유지해야 해요. 성광이로 있다가 갑자기 배역으로 태세전환이 잘 안되는 건데, 그게 잘 되는 나를 바라지도 않아요. 연극배우로 잘 살고 있는 지금의 제가 좋거든요.”

연극배우만의 행복도 있냐 물으니 “관객의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이란다. “전에 박근형 연출이 누군가 막 혼내면서 그러더군요. ‘야 임마 대사 쉽게 치지 마. 오늘 본 관객은 10년을 기억한다’고. 그 말에 ‘아, 그렇게 전달된다면 참 좋겠다’ 싶었어요. 전달되지 않더라도 그런 의도를 갖고 무대에 서고 싶고, 연극배우의 연기는 기억에 더 오래 남는 것이라 믿고 있죠. ‘조씨고아’도 그랬으면 해요. 이제 100회라니, 앞으로 100회 더 하면서 더 오래 기억되고 싶어요.” 10년 전 연극 ‘배수의 고도’에서 처음 본 그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행복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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