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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권 놓고 미국과 마주 앉을 일 없다" 핵 포기 없다는 김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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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 연합뉴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4개월여 만에 담화를 내고 군사정찰위성 발사 문제를 논의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와 이를 주도한 미국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대화에도 대결에도 준비한다"고 밝혀 원론적으로 대화 가능성에도 여지를 뒀지만, 결국 북한의 핵 보유를 인정하기 전에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 없어 보인다.

"자주권, 협상의제 될 수 없어"

김여정은 30일 새벽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공개한 담화에서 미국을 향해 "조미(북·미) 대화 재개의 시간과 의제를 정하라고 한 미국에 다시 한번 명백히 해둔다"며 "주권국가의 자주권은 그 어떤 경우에도 협상의제로 될 수 없으며 그로 인해 우리가 미국과 마주 앉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북한과 언제 어디서든 만나 어떤 문제도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여온 데 대한 반응이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에 쏘아 올린 군사정찰위성은 물론 자위력 확보 차원에서 개발한 것이라 주장하는 핵·미사일을 놓고 절대로 타협하거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재차 확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7일(현지시간)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와 관련해 소집된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 유엔 웹티비 캡처

지난 27일(현지시간)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와 관련해 소집된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 유엔 웹티비 캡처

김여정은 유엔 안보리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극도의 이중 기준이 파렴치하게 적용되며 부정의와 강권이 난무하는 무법천지"라며 "단호히 규탄 배격한다"고 언급하면서다. 그는 "미국의 무기들이 공화국을 겨냥하지 않았다고 장담하기에 앞서 평양으로부터 불과 500~600km 떨어진 남조선의 항구들에 수시로 출몰하고 있는 전략적 목표(전략무기)들이 어디에서, 왜 왔는지를 명백히 해명해야 했을 것"이라며 북한의 안보리 결의 위반을 지적한 린다 토마스-그린필드 유엔 주재 미국 대사를 저격하기도 했다.

한·미를 비롯한 다른 나라의 위성 발사는 문제 삼지 않으면서 왜 '자위권에 해당하는 정당한 주권 행사'인 자신들의 위성 발사만 규탄하느냐는 북한의 기존 입장과 동일한 주장이다. 대미·대남 등 대외문제를 총괄하는 것으로 알려진 김여정이 담화를 낸 건 한·미 핵협의그룹(NCG) 첫 회의를 하루 앞두고 한·미의 확장억제 움직임에 경계심을 드러낸 지난 7월 17일 이후 넉달여 만이다.

김여정 명의의 담화와 관련해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김 부부장이 담화에서 밝힌 대로 대화와 대결 중 무엇이 진정 북한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것인지, 무엇이 북한 주민의 민생에 도움이 될 것인지 스스로 현명하게 판단해야 한다"며 "북한은 이제라도 도발과 위협의 길에서 벗어나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올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조건부 대화 가능성도

김여정은 미국에 대해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양면적 입장과 행태를 보이고 있다"며 "강권과 전횡의 극치인 이중기준과 더불어 조선반도(한반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파괴하는 악성인자"라고 비난을 이어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2일 오전 10시 국가항공우주기술총국 평양종합관제소를 방문하고 궤도에 진입한 정찰위성 '만리경-1'호의 작동상태와 세밀조종진행정형, 지상구령에 따른 특정지역에 대한 항공우주촬영진행정형을 점검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 22일 오전 10시 국가항공우주기술총국 평양종합관제소를 방문하고 궤도에 진입한 정찰위성 '만리경-1'호의 작동상태와 세밀조종진행정형, 지상구령에 따른 특정지역에 대한 항공우주촬영진행정형을 점검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그러면서도 "앞에서는 대화 타령을 늘어놓고 뒤에서는 군사력을 휘두르는 것이 미국이 선호하는 '힘을 통한 평화'라면 대화에도 대결에도 다 같이 준비돼야 하며, 특히 대결에 더 철저히 준비돼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일관한 대미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이는 미국이 자신들의 자주권과 근본 이익을 인정한다면 조건부로 대화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취지로 읽힌다. 미국을 향해 자신들이 가졌다고 주장하는 만리를 굽어보는 '눈(위성)'과 만리를 때리는 강력한 '주먹(미사일)'을 인정하라는 요구인 셈이다. 하지만 이는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라는 주장으로,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가 용인할 수 없는 조건이다.

오경섭 연구위원은 "북한이 대화의 기본 조건으로 핵보유 인정과 대북제재 해제라는 기존 요구를 반복하는 모습"이라고 말했다.

김여정이 이날 "주권적 권리에 속하는 모든 것을 키워나가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며 "공화국(북한)은 모든 유엔 성원국들이 향유하는 주권적 권리들을 앞으로도 계속 당당히, 제한 없이 행사해나갈 것"이라고 주장한 것도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1일 평안북도 철산군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첫 정찰위성 '만리경 1호'를 신형위성운반로켓 '천리마 1형'에 탑재해 발사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1일 평안북도 철산군 서해위성발사장에서 첫 정찰위성 '만리경 1호'를 신형위성운반로켓 '천리마 1형'에 탑재해 발사하는 장면을 지켜보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미가 각각 내세운 문턱이 높기 때문에 대화가 성사될 가능성은 여전히 작다"면서도 "김여정의 담화에 자주권을 인정한다면 대화에 나설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겼다는 것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통일부 당국자도 "담화 자체만 갖고 (북·미 간) 대화 가능성을 예단하기는 어렵다"며 "담화 자구에 지나치게 의미를 둘 사안은 아니며, 미국이 여러 경로로 북한에 대화가 열려 있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대화를 원하면 그에 응하면 된다"라고 말했다.

"안전고리 뽑아" 9·19합의 정지도 비난

북한은 이날 조선중앙통신 논평을 통해 윤석열 정부의 9·19남북군사합의(9·19합의) 일부 효력정지 결정도 또 비판했다.

북한은 논평에서 "논리와 이치에 맞지도 않게 우리의 정찰위성 발사에 대한 '대응'으로 효력 정지라는 '조치'를 서툴게 고안해내며 마지막 '안전고리'마저 제 손으로 뽑아버렸다"고 반발했다.

국방부는 지난 24일부터 북한군이 DMZ 내 최전방 초소(GP) 복구에 나선 모습이 우리 군의 열영상장비(TOD) 등 감시 장비에 포착됐다고 27일 밝혔다. 사진은 북한군이 GP를 철거했던 장소에 경계호를 조성하고 고사총(무반동총)을 배치한 모습. 국방부 제공, 뉴스1

국방부는 지난 24일부터 북한군이 DMZ 내 최전방 초소(GP) 복구에 나선 모습이 우리 군의 열영상장비(TOD) 등 감시 장비에 포착됐다고 27일 밝혔다. 사진은 북한군이 GP를 철거했던 장소에 경계호를 조성하고 고사총(무반동총)을 배치한 모습. 국방부 제공, 뉴스1

이어 "군사분계선 지역에 보다 강력한 무력과 신형군사 장비들을 전진 배치하겠다"고 밝힌 지난 23일 국방성 명의의 발표를 상기하면서 "괴뢰지역에 언제 어떤 화를 불러오겠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든 것과 같은 비참한 결과가 괴뢰 역적패당에게 차려질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편 북한은 이날도 군사정찰위성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대내외 선전을 이어갔다. 북한 매체들은 '만리경 1호'가 지난 29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해군기지를 새벽 2시 24분 50초에 촬영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같은 날 오전 10시 16분 42초에는 일본 오키나와의 가데나 공군기지를 촬영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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