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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재의 전쟁과 평화

‘9·19 합의’ 내던진 북한, 노림수는 “내년 한국 총선 개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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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철재 기자 중앙일보 국방선임기자 겸 군사안보연구소장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이철재 군사안보연구소장·국방선임기자

9·19 남북 군사합의(군사합의)가 5년 만에 사실상 휴짓조각이 됐다.

정부가 북한의 군사정찰위성 발사에 대해 지난 22일 군사합의 중 ‘비행금지구역 설정’(1조 3항)의 효력을 정지하자, 북한은 23일 군사합의의 완전 무효화를 발표했다. 북한은 그 직후 군사합의에 따라 파괴·철수했던 비무장지대(DMZ) 안 GP에 병력과 중화기를 다시 투입하고, 서해 해안포 진지의 포문 개방을 늘리며,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의 북측 경비인원을 권총으로 무장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군사합의를 전면적으로 파기하지 않고 일단 “북한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조치들을 취해 나갈 것”(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북한은 최전방 지역에서의 군사훈련 재개 등 군사합의의 거의 모든 조항을 어길 가능성이 크다. 결국 9·19 군사합의에 대한 ‘사망선고’는 시간문제다.

2018년 정상회담 때 북에 ‘선물’
졸속 협의로 ‘상호검증’ 빠뜨려
“전쟁 우려”는 북한이 원하는 것
철저한 대비, 냉정한 대응 필수

“신뢰하되 검증하라” 미·소 핵군축 비결

2018년 9월 19일 송영무 당시 국방부 장관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이 군사합의문에 서명 한 뒤 교환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2018년 9월 19일 송영무 당시 국방부 장관과 노광철 북한 인민무력상이 군사합의문에 서명 한 뒤 교환하고 있다. [평양사진공동취재단]

군사합의의 정식 명칭은 ‘역사적인 판문점선언 이행을 위한 군사 분야 합의서’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한반도의 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협력해 나갈 것”에 약속했다. 같은 해 9월 19일 평양에서 남북 국방장관이 “군사적 긴장 상태를 완화하겠다”며 서명한 게 군사합의다.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한 뒤 군사합의는 무력화한 것과 다름없었다. 협상으로 한국과 미국으로부터 이익을 받아낼 길이 막히자 북한이 협박으로 전략적 수단을 바꾸면서, 군사합의는 거추장스러운 장애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말 한마디에 서해 창린도 해안포대가 군사합의의 ‘서해 완충구역’을 향해 포를 쐈다. 김 위원장은 남북 국방장관이 군사합의에 서명했을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과 함께 바로 뒤에서 이를 지켜본 인물이다. 창린도 포 사격은 북한의 군사합의 파기 선언과 같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유감” 표명에 그쳤다.

이후 북한은 아군 GP 사격,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서해 공무원 피살, 북방한계선(NLL) 이남으로의 미사일 발사, 무인기 침투 등 9·19 군사합의를 차츰 깨뜨렸다. 북한의 잇따른 위반 때문에 군사합의는 이제 껍데기만 남은 상태다.

군사합의는 처음부터 치명적 약점을 가졌다. 북한의 선의에 전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는 ‘천수답(天水畓) 합의’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북한은 합의 사항을 충실하게 지킬 의지가 전혀 없었다. 대신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항은 놓아둔 채 다른 조항은 무시하는 ‘체리피킹(Cherry Picking) 전략’을 구사했다. 특히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북한엔 군사합의의 레드라인이다. 휴전선 일대의 북한 장사정포 활동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는 한·미 항공 정찰자산의 눈을 가릴 수 있어서다. 정부가 이를 효력 정지하자 북한이 곧바로 발끈한 이유다.

군사합의의 또 다른 태생적 한계는 군비통제의 핵심인 상호검증 장치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냉전 때 미국과 소련은 ‘Trust but verify(신뢰하되 검증하라)’ 원칙에 따라 핵기지를 서로 방문하고, 상대 영공에 정찰기를 보내는 감시를 통해 핵무기를 줄였다. 군사합의에 이 같은 절차가 빠진 원인으로 너무 서두른 탓도 있었다.

북한군이 9·19 군사합의에 따라 파괴했던 DMZ 안 GP를 다시 설치하고 병력·무기를 재투입하는 모습. [사진 국방부]

북한군이 9·19 군사합의에 따라 파괴했던 DMZ 안 GP를 다시 설치하고 병력·무기를 재투입하는 모습. [사진 국방부]

남북 군 당국은 2018년 6~9월 2차례 장성급 회담, 1차례 실무급 회담으로 군사합의를 조율했다. 팩스로도 의견을 교환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전직 정부 당국자는 “당시 북한이 적극적으로 임했다”고 귀띔했다.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서 가장 바랐던 경제협력은 촘촘한 유엔의 대북 제재 때문에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래서 북한은 한국의 군사적 양보를 원했다. 비행금지구역과 군사연습 중지라는 청구서를 내밀었고, 한국은 별말 없이 받아들였다.

‘속도전’으로 밀어붙이다 보니 군사합의는 허술할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북한의 군사합의 위반 사례 3600여건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해안포 진지 포문 개방이다. 북한은 해안포 진지에서 습기를 빼내려고 주기적으로 포문을 열어 환기하곤 한다. 남북은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해안포와 함포의 포구 포신 덮개 설치 및 포문폐쇄 조치’(1조 2항)를 군사합의에 집어넣었다.

한국에 모든 책임 지우려는 북한

북한의 몽니로 한반도의 군사적 정세가 심상찮게 되자 일각에선 “완충지대가 사라져 전쟁 일촉즉발까지 갈 수 있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이는 북한의 노림수다. 한반도에서 적대행위와 무력행사를 금지하고 평화질서를 유지하는 질서는 군사합의가 아니라 정전협정과 남북기본합의서다. 그리고 북한은 군사합의뿐만 아니라 정전협정과 남북기본합의서 ‘상습 위반범’이다. 그런데도 북한은 한국이 군사합의를 버린 장본인이라고 궤변을 늘어놓으며, 앞으로 벌어질 사태의 책임까지 한국에 넘기려 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의 대응을 간 보면서 호전적 공세를 벌일 전망이다. 시드니 사일러 전 미 국가정보국 산하 국가정보위원회 북한 담당 분석관은 자유아시아방송(RFA)과 인터뷰에서 “김정은이 윤석열 정권을 상대로 보다 공격적이고 치명적일 수 있는 제한적 도발을 내년에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은 군사적 위협으로 주도권을 잡으면서 이 모든 게 한국이 9·19 군사합의를 파기해 벌어진 일이라는 인지전·하이브리드전을 구사할 것”이라며 “국내 정치적 혼란을 일으키고 내년 총선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가 자칫 움츠러들거나 물러난다면 남북 치킨게임(Chicken Game)은 북한의 승리로 끝난다.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며 강하게 맞받아친다면 이 역시 북한의 수에 말리는 일이다. 철저한 대비 태세로 북한의 경거망동을 억제하면서, 북한의 군사 행동에 상응하는 조처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실행하는 게 최고의 대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