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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재홍의 시선

호주의 당당한 대중 외교 배워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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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박진 외교부 장관은 지난 26일 부산에서 열린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에서 “앞으로 (3국) 정상회의 개최가 머지않은 시점에 가시화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공을 들였던 한·중·일 정상회의 연내 개최가 중국의 비협조로 사실상 무산됐다는 뜻이다.

이번 한·중·일 외교장관 회의는 4년 전 회의와 비교해 대북 공조에서도 후퇴했다. 요미우리신문은 박 장관과 가미카와 요코 일본 외무상은 모두 발언에서 북한 문제를 거론했지만, 왕이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겸 외교부장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4년 전 회의 때는 3국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지만, 이번에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소통을 이어나가기로 했을 뿐이다. 중국 측은 당사국들이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일관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계열 글로벌타임스는 중국 전문가들을 인용해 한·미·일 협력이 실질적 성과로 이어지려면 한·일이 대만·동중국해·남중국해 등 중국의 핵심이익을 존중하고 더 많은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중일 정상회의 연내 개최 무산
중국, 한반도 비핵화에도 소극적
대중 관계는 의연하고 일관되게

중국은 최근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도 한국을 외면하는 행보를 보였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4시간 동안 회담하고,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반면, 윤석열 대통령과는 별도 회담 없이 3분 정도 만나는 데 그쳤다.

윤 정부 들어 한국은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는 등 자유민주주의 노선을 추진하고 있다. 지난 8월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의에서는 한·미·일 공동성명 중에선 최초로 ‘중국’을 명시하면서 남중국해와 대만해협 등에서의 불법·강압적 활동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중국이 미·일에 밀착하는 한국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길들이려 한다고 진단한다. 중국은 과거에도 한국 길들이기를 해왔다. 2016년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 결정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산 문화 콘텐트의 중국 수출을 차단하고, 중국 여행사들의 한국 단체여행 모집을 사실상 금지했다. 중국은 올해 초 ‘제로 코로나’ 정책 폐기에 따라 태국 등 60개국에 대한 자국민 단체여행을 허용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지난 8월에야 풀었다.

한국 정부는 과거 중국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왔다. 전임 문재인 정부에서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공을 들이며 미·일과 멀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중국에 한국은 압박하면 물러나는 물렁한 나라라는 인식을 줬다.

이는 호주의 중국 대응과 대비된다. 호주가 2020년 4월 중국에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원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자, 중국은 호주산 육류·와인·석탄 등의 수입을 제한했다. 이로 인해 호주의 중국 수출 비중은 2020년 40.5%에서 2022년 29.5%로 떨어지는 등 타격을 입었다. 중국도 호주산 석탄 수입 금지로 2020년 겨울 심각한 전력난을 겪었다. 호주는 2021년 9월 미국·영국과 안보 삼각 동맹인 오커스(AUKUS)를 맺어 미국 주도의 중국 견제에 힘을 보탰다. 호주가 대중 외교에서 일관된 행보를 보이고 지난해 5월 친중 성향의 노동당이 집권하며 양국 관계는 정상화되고 있다. 시 주석은 지난 6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앤서니 앨버리지 호주 총리와 7년 만의 정상회담을 갖고 “건전하고 안정적인 중국·호주 관계는 양국의 공동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중국은 한국에서 미국을 밀어내 한반도를 자국 영향권 아래 두려고 하고, 미국은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 등을 통해 대중국 견제에 한국을 더욱 끌어들이려 한다. 한국은 북한 위협 때문에 한·미 동맹이 필수이지만, 중국과의 경제 관계도 중요하다. 미·중 대결이 더욱 치열해지며 한국이 양국 사이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한국은 미국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북한 위협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해방 이후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통해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이뤘다. 미래에도 한국의 국익은 자유민주주의에 있다.

호주 사례에서 보듯 중국의 압박에는 국익에 기반해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중국이 언제까지나 한국을 무시할 수는 없다. 중국은 20% 이상의 청년 실업률과 불안정한 부동산 시장, 막대한 지방정부 부채 등으로 인해 경제 회복이 시급하다. 한국이 자유민주주의를 일관되게 내세우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의연하게 추진한다면 한·중 관계도 머지않아 정상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