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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빈대당’ 퇴치법

중앙일보

입력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50년 만에 냉동인간이 발견된다. 희대의 뉴스에 난리가 난다. 그대로 얼려 둘까, 아니면 녹여낼까. 토론 끝에 해동을 결정한다. 한데 옛사람과 함께 벌레 한 마리도 함께 소생한다. 바로 빈대다. 오랜 동면에서 깨어난 사람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이 빈대에 물려 가려운 곳을 긁는 것이었다.

위성정당 방지법 놓고 국회 혼란
여야의 얕은 술수 더는 안 통해
‘빈대도 낯짝은 있다’ 속담 잊었나

 러시아 시인 마야콥스키(1893~1930)의 희곡 ‘빈대’(1929) 이야기다. 요즘 한창 시끄러운 ‘빈대 습격사건’을 둘러보다가 한 세기 전의 이 작품과 마주쳤다. 러시아혁명 이후의 속물근성, 그리고 이후 불어닥친 전체주의를 동시에 풍자하고 있다.

 시인의 상상력은 날카롭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부박한 풍조를 꼬집은 건 그렇더라도 그가 죽고도 한참 뒤에 일어난 전체주의를 예견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개인보다 집단, 시민보다 국가를 우선하는 이념의 허구성을 벗겨낸다. 오늘날 러시아 사회를 보는 듯하다. 그 시간의 틈을 잇는 게 빈대다. 시인은 사람이나 빈대나 별반 다르지 않다고 조롱한다.

 희곡 ‘빈대’에서 해동인간과 벌레는 동물원에 갇힌다. 전염병을 옮기는 위험인자지만 교육효과가 빼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더 우스꽝스러울까. 유리장 안의 구경거리일까, 바깥 구경꾼일까. 시인은 해동인간의 손을 들어준다. 체제에 매몰된 군중보다 자기 색이 분명한 개인이 훨씬 더 인간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빈대는 질기다. 참으로 질기다. 앞의 희곡에서도 50년 전 러시아 노동자를 가장 괴롭힌 벌레가 빈대였다. 요즘 우리 사회에 갑자기 되살아난 빈대 또한 더욱 강력해졌다. 웬만한 살충제에도 까딱하지 않는다고 하니 생명력이 대단할 뿐이다.

 최근의 빈대 소동을 보며 ‘빈대당’을 떠올렸다. 이름하여 ‘위성정당’이다. 이번 21대 국회를 분탕질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악성 종양과 같다.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다는, 즉 군소 정당의 의회 진출을 돕는다는 애초 의도와 달리 기존 여야의 ‘새끼 정당’(더불어시민당·미래한국당)이 ‘어미 정당’의 배만 불려주는 꼴이 됐다. 그 후유증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내년 4월 22대 총선을 앞두고 ‘빈대당’이 다시 들끓고 있다. 위성정당을 없애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는가 싶더니 막상 선거가 다가오자 정치권은 어정쩡한 태도만 보인다. 특히 거야 민주당의 말 뒤집기가 옹졸하다. 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는 못할망정 국민의 아픈 곳만 찔러대는 ‘빈대당’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여당도 오십보백보다. 21대 이전의 병립형(정당 득표율에 따라 비례의석 배분, 군소정당에 상대적으로 불리)으로 돌아가자면서도 현행 준연동형을 유지할 경우 다시 위성정당을 만들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유권자를 볼모로 잡겠다는 발상에선 매한가지다. 지난주 전국 695개 노동시민단체가 연동형은 유지하되 위성정당은 막는 선거법 개정을 요구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보건학자 김승섭의 신간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에서 ‘시스젠더’라는 용어를 만났다. 출생 시 법적 성별과 성별 정체성이 일치하는, 트랜스젠더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많은 이들처럼 한국의 여야는 여타 다른 세력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여의도 시스젠더쯤 된다. 그들의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에선 ‘제3의 목소리’가 끼어들기 어렵다. 그런 사이에 재화를 고루 배분해야 할 정치가 ‘알량한 정치’로 전락하고, 여러 갈등을 조정해야 할 정치에 말도 거창한 ‘오천만의 문법’이 침입한다.

 위성정당은 거대 여야라는 공동이익체가 만든 못난이다. 내년 총선까지 이것 하나라도 막는 데 합의한다면 이번 국회는 그나마 마지막 박수를 받을 수 있다. 다만 미덥지는 않다. ‘중이 고기 맛을 보면 절에 빈대가 안 남는다’고 했던가. 그래도 믿어 본다. ‘빈대도 낯짝이 있다’고 했다. 국민은 비례대표 산식(算式)을 몰라도 된다고? 대단한 착각이다. 유권자는 절대 두 번 속지 않는다.

글 = 박정호 수석논설위원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