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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봄' 정우성 맡은 장군의 끝…실제 일가족 풍비박산 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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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개봉한지 6일 만에 누적 관객 수 200만명 돌파하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 ‘서울의봄’은 1979년 12·12 군사반란의 과정을 시간 단위로 그렸다. ‘역사가 스포’라는 말이 있듯 관객 모두가 결말을 알고 보면서도, 신군부 전두광(전두환) 보안사령관 세력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이태신(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긴박한 9시간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졸이게 한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극중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 역을 맡은 배우 정우성.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영화 '서울의 봄'에서 극중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 역을 맡은 배우 정우성.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그러나 영화에서도, 역사에서도 좀처럼 ‘스포’ 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이태신 사령관의 끝이 어땠는지다. 실제 그는 역사에서 전두환 세력에 맞섰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모티브로 했다. 김성수 감독은 극중 인물의 이름을 가명으로 바꾼 이유에 대해 “캐릭터를 설정하는 데 있어 자유로워졌다”며 “이태신은 극중에선 ‘흔들림 없고, 지조 있는 선비’처럼 묘사되지만 실제 장태완 사령관은 ‘불같은 성격’이었다”고 설명했다.

광화문 대치는 없었다

시사저널이 2006년 공개한 장태완 사령관의 ‘육필 수기’를 보면 그는 12·12 군사반란 당일 자신을 회유하려던 유학성 군수차관보와의 통화에서 “여럿이 모여서 뭐하고 있는 것이냐”며 “야! 이 더럽고 추잡스런 놈아! 너는 끝까지 그따위 처신으로 군인 생활을 마칠 것인가?”라고 한참 동안 욕설을 퍼부었다. “내 전차를 몰고 가 네놈의 대가리부터 깔아뭉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12월 13일 오전 비전투병까지 소집해 준비한 출동은 참모들의 만류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고, 영화 속 경복궁 앞 반란군과의 대치는 일어나지 않았다. 장태완 사령관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영화 '서울의봄'에서 전두광(실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반란군과 대치하는 수도경비사령부 병력. 이는 극몰입감을 위해 연출된 장면으로 사실과 다르다. 사진 유튜브 캡처

영화 '서울의봄'에서 전두광(실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반란군과 대치하는 수도경비사령부 병력. 이는 극몰입감을 위해 연출된 장면으로 사실과 다르다. 사진 유튜브 캡처

“(…)모든 것은 끝난 것 같습니다. 사무실로 올라가서 사후 정리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비서실장이) 건의했다. 직감적으로 ‘이제 수도경비사령부는 내 부대가 아니고, 내 부하들이 아니다. 취임한 지 불과 24일 만에 나의 부대라고 믿었던 내 생각부터가 착각이었다’고 마음속으로 느끼면서 비서실장 건의대로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때가 12월 13일 오전 1시 31분경이었다. 그는 자신을 “수도경비사령관의 책무를 완수하지 못한 죄인”이라고 자책했다.

일가족 풍비박산...외동딸 보고 살겠다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이 2004년 5.18관련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중앙포토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이 2004년 5.18관련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중앙포토

실패한 영웅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장태완 사령관은 서빙고분실에서 45일간 고초를 겪고, 강제 예편됐다. 풀려난 후에도 6개월간 가택 연금 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이런 사실을 비관해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시다 1980년 세상을 떠났다. 가택 연금 생활 중에도 공부를 열심히 해 서울대에 합격했던 장태완 사령관의 아들은 1982년 학교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후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당시 장태완 사령관은 아들의 묘지에서 “우리 내외의 인생은 사랑하는 성호(아들)가 이 세상을 떠났던 1982년 1월 9일로 끝난 것이다. 이제 남은 인생은 더부살이로서 우리 일가 3대를 망친 12·12사건을 저주하면서 불쌍한 외동딸 현리 하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참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전두환 전 대통령이 공기업인 한국증권전산 사장에 장태완 사령관을 임명했을 때 그는 이를 수락했다. 용서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1993년 7월 19일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반란 및 내란죄 혐의로 대검에 고소했고 1996년 법정에서 두 사람을 향해 “한때는 함께 국방에 열심을 다하던 입장이었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는지 모르겠소”라는 말을 남겼다. 2000년엔 새천년민주당 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인으로 제2의 인생을 이어갔다.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장태완 사령관이 2010년 7월 26일 79살의 나이로 별세한 2년 뒤 그의 아내 이모씨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경찰은 이씨가 평소 우울증을 앓아왔다고 밝혔다.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중앙포토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중앙포토

장태완 사령관의 저서로는『12·12 쿠데타와 나』가 있다. 그는 과거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1987년 11월 화병으로 인해 받은 심근경색 수술도 원점으로 돌아가는 듯 가슴앓이 통증이 가끔씩 재발한다”며 “나처럼 12·12군사반란에 대해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도 없을 거다. 죽기 전 군사반란의 실상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심근경색 수술 전 병실에서 일주일간 이 책을 집필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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