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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북콘서트의 계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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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글로 생계를 잇는 전업 작가는 자신의 저서가 부끄럽다. 혹시 투박한 감정이 들키지는 않았는지 노심초사다. 긴장감이 역력한 저자를 만나는 자리, 북카페에서 조촐하게 열리는 독자와의 대화는 정겹다. 그런데 도시를 옮겨 다니며 요란한 북콘서트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특별한 목적이 있다. 과시와 변명, 팬덤 관리, 공론 왜곡. 정치인들의 레퍼토리다.

총선용 북콘서트는 전염처럼 퍼진다. 지적인 이미지로 치장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무대가 없다. 그렇게 바쁜 사람들이 직접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저자로 등극한다. 열혈 지지자들 앞에 마음은 절로 들뜨고 마이크를 잡은 자신은 응급구조대나 정의의 기사가 된다.

정의로 치장한 정치인 북콘서트
외설과 비루한 표현의 난장판
국민 공헌과 시민 역할을 가로챈
말 고수들 가려 낙선운동 펼쳐야

86세대의 맏형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가 테이프를 끊었다. ‘별것도 아닌’ 돈봉투 건으로 자신과 주변을 못살게 구는 검찰을 겨냥한 분노와 적개심이 적란운처럼 피어올랐다. 저서 제목도 ‘선전포고’였다. 윤석열 정권과 한동훈 검찰을 향한 공개적 전쟁 선언. 첫 장을 넘길 때 한껏 부풀려진 호기심은 그러나 거친 편견과 균형 잃은 주장 속으로 속절없이 사그라졌다. 정권비판의 논거도 그렇고 난무하는 욕설은 문맥마다 걸렸다. 그래도 대통령인데 최소한의 예의를 차렸으면 하는 소시민적 바램은 무색해졌다. 가령 “이 정부는 무능하고, 무모하고, 무도하고, 무책임하다. 불안하고, 불의하고, 불공정하다.” 사무삼불(四無三不)로도 분이 안 풀렸는지 “그는 대통령이 아니라 (...) 권력욕만 가득한 왕초”는 예사고, “아예 국가 주권을 일본에 팔아먹는 매국 정권, 조선총독부 총독”이라 했다. 심금을 울리기는커녕 그럼 ‘문재인 정권은?’이란 의문이 자동 반사됐다.

‘꼼수 탈당’의 주역 민형배 의원이 배턴을 받았다. 그의 『탈당의 정치』 북콘서트에 ‘처럼회’ 주역인 김용민 의원, 최강욱 전 의원이 참석했는데 역시 원색적 감정의 난장(亂場)이었다. 동물의 왕국, 동물농장, 설치는 암컷 같은 말은 술자리에나 있을 법한 취언(醉言)일 터, 맏형 송영길이 들었다면 유치하다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송영길은 아예 ‘정권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겼다’고 했다. 윤 정권이 나라를 결딴냈다는 뜻인데,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러니 구한말 의병처럼 분연히 일어나야 한다거나, 제2의 독립투쟁 깃발을 들자는 외침이 어느 부족 추장의 주술처럼 들릴밖에. 이들의 거칠고 조야한 언술과 문맥에 문재인 정권을 그대로 대입해도 달리 읽히지 않았다면 내 독해가 잘못된 것일까.

반일 전선의 주인공 윤미향이 가만있을 리 없다. 제목은 『윤미향과 나비의 꿈』. 식민적 야만에 희생된 원혼을 풀고자 나풀거렸던 순정(純情)의 나비에게 ‘후원금 횡령’이 웬 뚱딴지같은 소린가? 그것은 “무죄, 무죄, 무죄”로 끝날 검찰 카르텔의 마녀사냥이라는데, 조국과 추미애가 손님으로 등장했다.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울컥한’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시련의 나날을 보내는 조국은 망가진 마음을 추슬러 『디케의 눈물』을 펴냈다. 검찰개혁에 실패한 저간의 사정을 분을 참고 짚었다. 법치와 검치를 분별하고, 냉혹한 형벌에도 공감과 연민을 중시했던 정의의 여신 디케(Dike)의 혼을 불러냈다. 거기까진 학자다웠다. 최근 페이스북에서 포문을 열었다. 대통령의 당무 개입은 탄핵 사유가 된다고. 당무 개입과 당정 협의의 경계가 어디인지 헷갈리는데, 대통령을 향한 분노와 적개심은 86세대 사령탑 송영길이나, 북콘서트에 나선 그의 후예들과 동형구조다.

19세기 후반 영국도 ‘사회적 자아’와 공적 언어를 무시하는 정치인들 때문에 몸살을 앓았다. 이를 우려한 사상가 밀(J.S.Mill)은 ‘일정한 정신연령에 도달한 사람에게만 자유를 허용하라’고 경고했다(『자유론』). 북콘서트는 외설이자 비루한 표현의 나팔수가 됐다. 나치즘과 싸웠던 카를 포퍼(K. Popper)가 말했다. 시대적 객관성은 ‘친구와 원수들 간의 협동’에서 형성된다고. 외설을 표현적 자유라고 외치는 정치인들이 바로 열린 사회의 적이다.

과학기술 대국을 꿈꾸는 서울대 이정동 교수팀이 그랜드 퀘스트(Grand Quest) 10개를 내놨다. 추격자에서 리더로 변신하려면 질문을 바꿔야 한다. 절정에서 정체된 한국, ‘피크 코리아’를 벗어나 더 높은 고지로 가는 길을 비췄다. 그렇다면, 정치는, 사회는?

피크 코리아(peak Korea), 진정 여기가 끝일까? 희망을 품을 수나 있을까. ‘사회적’ 그랜드 퀘스트를 찾아 나서기 전에 꼭 해결할 전제가 있다. 한국 사회에 드리워진 증오심의 짙은 안개를 걷는 일이다. 증오의 정치는 전염된다. 막말과 못된 말을 쏟아낸 사람이 감염원이다. 사회적 백신의 제조와 살포는 간단하다. 4년간 막말과 못된 말 횟수를 따져 낙선 운동을 하면 된다. 상위 10걸은 이미 알려져 있다. 민주화를 성취한 국민적 공헌과 민주주의의 공평한 역할 분담을 가로채 간 그들. 정치는 말로 하는 행위라지만, 이젠 어눌한 사람이 그립다. 86세대가 자연 퇴진하려면 거의 10여 년 세월이 남았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 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