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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 새벽 4시 '꼬끼오'…"환청인가" 잠 못드는 시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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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오장동에 거주하는 백모(30)씨는 한달 전부터 매일 새벽 ‘강제 기상’을 하고 있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꼬끼오”하고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 때문이다. 백씨는 “10초 간격으로 5분 넘게 줄기차게 울어대니 잠에서 깰 수밖에 없다”며 “동네가 다 울릴 정도라 창문을 다 닫아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인근 중부건어물시장에서 닭을 키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장을 뒤져봤지만, 닭을 발견하진 못했다. 백씨는 “스트레스가 쌓이고 있다. 천적인 매 울음소리라도 녹음해서 틀어놓을까 고민 중”이라고 했다.

인쇄소와 오피스텔이 즐비한 서울 도심의 오장동 일대에서 아닌 밤중 닭 울음소리에 주민들이 잠 못 이루고 있다. 인근 오피스텔의 한 주민은 “처음엔 알람 소리인가 싶다가 나중엔 환청이 들리나 싶었다”며 “분명 닭 울음소리인데 위치도 모르겠고, 매번 잠을 설쳐 미칠 지경”이라고 했다. 서울 중구청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닭 울음소리를 해결해달라’는 민원이 이달 3건 접수됐다. 중구청 관계자도 여러 차례 일대를 탐문했지만 닭 위치를 특정하지 못했다.

최근 인쇄소와 오피스텔 등이 있는 서울 중구 오장동에서 ″닭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수소문 끝에 찾은 닭들은 오장동에 있는 한 건물 옥상의 닭장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영근 기자

최근 인쇄소와 오피스텔 등이 있는 서울 중구 오장동에서 ″닭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수소문 끝에 찾은 닭들은 오장동에 있는 한 건물 옥상의 닭장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영근 기자

중앙일보 취재진은 수소문 끝에 “인근 건물 옥상에서 닭을 키우고 있다”는 제보를 입수했다. 실제로 21일 오후 맞은편 건물 옥상에서 확인한 결과, 건물 옥상에 설치된 1평 남짓한 닭장에 흰색·갈색·검은색 닭 5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횃대에 오른 수탉은 오후 시간인데도 우렁차게 울며 목청을 뽐냈다. 인근 상인 이모(55)씨는 “닭이 시도 때도 없이 울길래 손님들도 의아해했다”며 “층간소음은 겪어봤어도 닭 소음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닭 주인은 닭을 계속 기르겠다는 입장이다. 닭주인 A씨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지인에게 병아리를 얻어 1년 전부터 길렀다”며 “법적으로 문제도 없는 데다, 애지중지 키워왔는데 민원이 있다고 해서 반려동물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니냐”고 말했다.

A씨가 닭을 계속 기른다고 해도 이를 제재할 수단은 마땅치 않다. 현행 ‘소음·진동관리법’은 반려동물 소리를 소음에 포함하지 않는다. 기계나 기구, 시설 그 밖의 물체의 사용으로 인한 것이나 사람의 활동으로 발생하는 강한 소리로 소음을 한정하고 있어서다. ‘공동주택 층간소음의 범위와 기준에 관한 규칙’에서도 반려동물 소음은 따로 규정하지 않고 있다. 중구청 관계자는 “반려동물 소음 민원이 들어와도 처분이 아닌 행정지도만 가능한 상황”이라고 했다. 박대수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3월 반려동물 활동으로 발생한 소리를 소음으로 규정하는 소음·진동관리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발의했지만 아직 국회 계류 중이다.

인쇄소와 오피스텔 등이 몰려 있는 서울 중구 오장동에서 "닭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수소문 끝에 찾은 닭들은 오장동에 있는 한 건물 옥상의 닭장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사진 이영근 기자

인쇄소와 오피스텔 등이 몰려 있는 서울 중구 오장동에서 "닭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다"는 민원이 제기됐다. 수소문 끝에 찾은 닭들은 오장동에 있는 한 건물 옥상의 닭장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사진 이영근 기자

유일한 해결책은 민사소송을 통한 개별 피해 구제다. 서울 동대문구 다가구주택에 거주하는 B씨는 지난 2016년 인접한 다가구주택에서 반려견 세 마리를 키우는 피고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B씨는 소송을 앞두고 “애완견들의 소음으로 고통이 매우 커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내용증명 우편을 두 차례 발송하고, 112 신고와 서울시에 민원을 접수해 피해를 사전에 입증했다. 2019년 서울북부지법 제11민사부는 “피고들의 애완견들이 짖는 소리로 일상생활이 방해되지 않도록 방지 조치할 의무가 있다”며 견주가 B씨에게 1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전문가들은 관련 규정 정비도 중요하지만, 반려인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차상곤 주거문화개선연구소 소장은 “반려동물 소음 관련 근거 규정 마련이 시급하지만, 동물단체 등 반대가 심해 입법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법을 따지기 전에 나에겐 사랑스러운 반려동물 소리가 누군가에게는 소음일 수 있다는 인식을 갖고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동물을 길러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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