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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책' 영국서도 팔릴까... 웨스트엔드 진출하는 K 뮤지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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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6호 20면

창작뮤지컬 수출 시대  

24일 서울에서 개막한 창작뮤지컬 ‘마리 퀴리’. 영국 진출을 목표로 현지에서 영어 프로덕션을 개발 중이다. [사진 라이브]

24일 서울에서 개막한 창작뮤지컬 ‘마리 퀴리’. 영국 진출을 목표로 현지에서 영어 프로덕션을 개발 중이다. [사진 라이브]

24일 두 버전의 창작뮤지컬 ‘마리 퀴리’가 서울과 런던에서 각각 공연됐다. ‘마리 퀴리’는 2021년 한국뮤지컬어워즈 대상, 작곡상 등 주요 5개 부문을 석권한 수작인데, 이날 개막한 올 시즌 공연에 김소현 배우의 합류로 더 화제가 됐다. 런던에서는 영국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어 버전이었다. 정식 무대가 아닌 리딩 공연이었지만, 내년 뮤지컬 본고장인 웨스트엔드 입성의 포문을 여는 무대였다.

지난 10일에는 또 다른 창작뮤지컬 ‘레드북’의 영어 프로덕션이 런던에서 리딩 공연을 진행했다. ‘레드북’도 2019년 한국뮤지컬어워즈 작품상, 연출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한 작품으로, 지난 봄 공연에 옥주현 배우가 출연해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역시 내년 영국 시장 진출이 예정돼 있는데, 영국 작품을 국내에 많이 소개해 온 제작사 아이엠컬처가 ‘레드북’ 창작진(한정석·이선영)으로부터 아시아권을 제외한 해외 공연권을 분리 확보해 현지 관객 정서에 맞게 개발 중이다.

‘레드북’ 영어 프로덕션 쇼케이스. [사진 각 제작사]

‘레드북’ 영어 프로덕션 쇼케이스. [사진 각 제작사]

2000년대 초 ‘오페라의 유령’ 등 대형 라이선스 작품 수입 위주로 시작된 국내 뮤지컬 산업이 창작뮤지컬 수출 시대를 맞고 있다. ‘명성황후’ ‘영웅’ 등 해외 투어에 나선 창작뮤지컬은 초창기부터 존재했지만, 지금은 문화 교류를 넘어 본격적인 현지 시장 진입 단계다.

국내 시장은 팬데믹 보복소비로 올해 매출 5000억원 돌파가 전망되는 등 유례없는 호황을 맞은 듯 보이지만, 사실 5~6년 전부터 포화상태라는 진단이 나왔다. 시장 확장이 필요한 상황인데, 랜선으로 유통 가능한 K팝이나 영화, 드라마에 비해 현장성이 강한 공연예술은 글로벌 시장 진출이 더딘 편이다. 일본 시장에서 네트워킹이 강한 EMK뮤지컬컴퍼니의 ‘엑스칼리버’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해 대만과 중국 시장을 공략한 라이브의 ‘팬레터’ 등이 성과를 냈지만, 아시아 시장은 공연 회차나 관객 수가 한정적이다.

전세계에서 관광객이 몰려드는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 시장에 도전하는 이유다. ‘레드북’ 영어 프로덕션을 개발 중인 정인석 아이엠컬처 대표는 “아직 우리 뮤지컬에 대한 니즈가 없는 영미권에서도 즐길 만한 모델을 만드는 중”이라면서 “우리가 영미 작품 라이선스를 많이 하듯 거꾸로 저들이 그런 작업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도록 맛보게 하는 마중물 붓기는 헛발질을 하더라도 누구든 뚫어야 하는 루트”라고 말했다.

사실 영국 빅토리아 시대 배경의 ‘레드북’이나 폴란드 과학자의 이야기 ‘마리 퀴리’ 같은 소재를 유럽에서 선보이는 것은 마치 구한말 신여성의 좌충우돌 성장기나 조선시대 위인전 번외편을  서양인들이 창작하는 셈이다. 현지에서 위화감은 없을까. 지난해 폴란드 바르샤바 ‘뮤직가든스 페스티벌’에서 ‘마리 퀴리’ 갈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라이브의 박서연 이사는 “폴란드가 마리 퀴리의 고국이라 걱정했는데, 인물을 넘어 과학을 소재로 뮤지컬을 만든 아이디어가 놀랍고 고맙다는 반응이었다”면서 “기립박수가 나오고 유럽에서 본공연도 해 달라고 할 정도였다. 마리 퀴리 박물관에서 6개월간 한국관 테마로 우리 작품 미니어처와 굿즈 등을 전시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마리 퀴리’ 영어 프로덕션 쇼케이스. [사진 각 제작사]

‘마리 퀴리’ 영어 프로덕션 쇼케이스. [사진 각 제작사]

정인석 대표도 영미권에서 우리의 강점으로 참신한 스토리의 힘을 꼽았다. 그는 “설도윤·박명성·윤호진·신춘수 등 선배 프로듀서들이 열정적으로 국내시장을 개척한 데다 공공기관의 유례없는 창작 지원 덕에 한국은 이제 전세계에서 기발한 신작이 가장 많이 쏟아지는 나라가 됐다”면서 “국내가 레드오션이 되어 해외시장에 교두보를 마련해 성과를 보고 있는 웹툰 업계처럼, 뮤지컬도 K엔터테인먼트 성공 공식을 그대로 따르는 중”이라고 말했다.

‘레드북’과 ‘마리 퀴리’의 영국 시장 입성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창작산실과 공연예술중장기창작지원사업을 통해 가능했다. 창작산실은 오랜 세월 번역물 위주였던 공연 시장에 우수한 창작물 개발을 단계별로 지원하는 사업으로, ‘레드북’은 2016년, ‘마리 퀴리’는 2018년 우수신작으로 선정돼 트라이아웃 공연부터 이례적인 호응을 얻으며 뮤지컬 시장의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중장기창작지원사업은 정부 주도가 아닌 예술단체의 자율적인 프로젝트를 최대 3년간 지원하는 사업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예술주체의 성장을 도모한다는 점에서 성과가 주목되는 지원 모델이다. 실제로 뮤지컬 분야는 지난해 본격 시작하자마자 현장 기획사들이 자발적으로 해외 시장 개척이라는 니즈를 발굴해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단순 유통을 넘어 현지 프로덕션 제작을 지원하는 유일한 지원사업인데다, 올해부터는 연간 최대 5억원으로 규모가 확대되어 1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는 등 관심이 뜨겁다.

이미 산업화된 뮤지컬에 국가 지원이 왜 필요하냐는 시선도 있지만, 지금은 우리 뮤지컬계 포지션이 라이선스 수입에서 창작 레퍼토리 개발 주체로 이동하는 단계다. 제작자들이 발굴하고 있는 해외의 니즈를 우리 창작자들이 글로벌 무대에 진출하는 계기로 이어가기 위해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신간 『뮤지컬의 탄생』을 낸 고희경 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은 “개발이 오래 걸리는 뮤지컬에 소액 다건식 지원은 의미 없다. 똘똘한 작품이 킬러 콘텐트로 크도록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글로벌하게 소비되는 물건이 나온다”면서 “특히 외곽에서 수년간 숙성된 작품이 진출하는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승부하려면 잘 되는 작품을 꾸준히 도와줘야 한다. 그쪽 시장에서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갈증이 심한 지금은 왕성하게 신작을 쏟아내는 우리 창작진에게 기회”라고 진단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정병국 위원장도 “이제 창작뮤지컬도 전세계 뮤지컬 시장에서 현지 관객과 만나야 할 때”라며 “이를 위해 2024년부터 공연예술중장기창작지원 예산을 대폭 확대하는 등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공적 자금 투입에는 한계가 있다. 투자 시스템을 보완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을 기대하는 이유다. 정인석 대표는 “그간 프로듀서들이 무모할 정도로 도전해 시장을 만들어 왔음에도 제작 파트의 중요성에 대한 인지도가 여전히 낮다”면서 “창작자 지원을 넘어 프로듀서 보호책이 시급한 상황이다. 뮤지컬만의 펀드를 조성하는 등 열악한 투자 시스템을 개선해 국내 제작환경부터 정비해야 원활한 글로벌 시장 진출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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