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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컷 cut

약하고 여린 마음들이 세상을 밝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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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디즈니+ 드라마 ‘작은 불빛(A Small Light)’의 배경은 ‘안네의 일기’다. 그런데 주인공이 안네 프랑크나 그 가족이 아니다. 그들의 은신처 생활을 도왔던 미프 히스다. 미프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이 나치 독일에 점령당한 후 2년 간 남편 얀과 함께 프랑크 가족을 부양한다.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면서 바깥소식을 알린 것이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유대인들을 도왔던 건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안네의 아버지 회사에서 미프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도 숨은 조력자였다. 남편 얀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것 같았던 직장 상사도 알고 보니 유대인을 뒤에서 돕고 있었다.

컷 c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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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령군인 독일인들 중에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있었다. 암스테르담을 빠져나가려던 유대인 가족이 체포되자 한 독일 장교가 아이들을 몰래 빼내 미프 부부에게 인도한다. 한 건물에 숨어있던 유대인 가족이 검거되고, 그 집 서랍 안의 갓난 아기를 안고 빠져나오던 얀이 병사와 부딪힌다. 멈칫하던 병사는 “성냥이 있느냐?”고 묻는다. 못 본 척 넘어가 준 것이다.

적극적으로, 혹은 소극적으로 그들은 왜 조력자가 됐던 것일까. 답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가 은신처에 한 명을 더 받아들일지 고민하다 미프에게 한 말 속에 있다. “안네 말이 맞을까 봐 걱정되기 시작했네.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외면하면 우리 옛 모습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그럼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거지.”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우리 모두는 어두운 방안에 작은 불빛을 켤 수 있다.” 미프가 남긴 말처럼 세상을 밝히는 것은 비범한 인물의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용기다. 다른 이의 고통을 외면하면 더는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할 거 같다는, 약하고 여린 마음들이 우리를 살만한 세상으로 이끈다. 깊은 어두움에 잠긴 요르단강 서안에도 작은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기를 빌어본다.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