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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수학자이자 전쟁 영웅, 동성애자…인간 튜링을 만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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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연극 ‘튜링머신’의 한 장면. 고상호(왼쪽) 배우가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을 연기한다. 이승주는 튜링의 동성 애인과 수사관·동료 등 세 캐릭터를 맡았다. [사진 크리에이티브테이블석영]

연극 ‘튜링머신’의 한 장면. 고상호(왼쪽) 배우가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을 연기한다. 이승주는 튜링의 동성 애인과 수사관·동료 등 세 캐릭터를 맡았다. [사진 크리에이티브테이블석영]

24살에 현대 컴퓨터의 전신인 ‘튜링머신’ 이론을 만든 천재 수학자, 독일군 암호 체계 ‘에니그마’를 해독한 종군 암호학자,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2년 앞당겨 1400만 명의 목숨을 살린 전쟁 영웅,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화학적 거세형을 받은 뒤 자살한 40대 남자….

서울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연극 ‘튜링머신’은 이토록 파란만장했던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1912~ 1954)의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1952년 어느 날, 절도 사건을 신고하기 위해 튜링이 경찰서를 찾는 장면으로 극은 시작된다.

수사관 로스는 튜링을 소련 스파이로 의심하며 과거 행적을 캐묻는다. 그 대화를 통해 튜링이 과거를 회상하면서 극은 현재와 과거를 오간다. 유년기 친구와 함께 체스를 두었던 기억, 호텔 서버로 일하는 아널드 머레이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기억 등 ‘인간 튜링’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에피소드 위주다.

앨런 튜링 역의 고상호는 객석과 무대를 자유롭게 오간다. 회상 신을 연기하다가 갑자기 빠져나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해설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삶을 설명하기도 한다. 튜링은 자신의 젊음을 바쳐 독일군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고, 독일군이 언제 어느 지역을 공격할지 예상할 수 있게 되지만, 곧바로 대응하진 않는다. 자신들의 암호 체계가 뚫렸다는 것을 독일군이 모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상호는 예견된 비극을 막지 못하는 비운의 암호학자를 섬세하게 연기해냈다.

배우 이승주는 수사관 미카엘 로스, 체스 챔피언 휴 알렉산더, 튜링의 동성 애인 아놀드 머레이 등 세 가지 캐릭터를 번갈아가며 연기한다. 일정한 직업도, 주거도 없이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튜링의 돈을 뺏는 거렁뱅이 연인 머레이를 능청스럽게 연기하다가도, 냉철한 말투로 튜링을 취조하는 수사관 로스로 얼굴을 바꾼다. 쉴 새 없는 캐릭터 전환이 다소 무거운 내용의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무대 장치도 인상적이다. 극장 한가운데 암호 해독 장치 ‘튜링 봄브’가 놓여 있고, 튜링의 삶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오브제처럼 핀 조명을 받으며 전시회 같은 느낌을 준다. 무대 위에는 튜링이 즐겨 두던 체스판, 마라톤화, 그리고 튜링의 자살 현장에 놓여 있던 한 입 베어 먹은 사과 한 알이 놓여있다. 객석은 무대를 빙 둘러싼 형태로 배치됐다.

연출은 소극장 연극의 묘미를 십분 살렸다. 객석이 무대의 네 면을 둘러싸고 있어 튜링의 내면세계에 들어간 듯한 느낌이다. 두 배우는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허물며 객석으로 뛰어들거나 퇴장하기도 하고, 객석에 앉아 연기도 한다. 자리에 따라 일부 장면에서는 배우의 등만 보이지만, 극 전반에 다양한 동선과 앵글을 활용해 어느 자리에서 봐도 큰 무리는 없다.

‘튜링머신’은 2018년 프랑스에서 초연한 뒤 이듬해 프랑스 몰리에르연극상에서 최우수 작품상과 작가상 등 4관왕에 올랐다. 국내에서는 이번이 초연이다. 연극 ‘그을린 사랑’ ‘와이프’로 백상예술대상·동아연극상 등을 받은 신유청이 연출을 맡았다. 튜링의 삶을 다룬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2014)과 비교하며 보는 것도 좋겠다. 공연은 25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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