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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선

금융당국의 절묘한 ‘횡재세’ 활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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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은행이 ‘공공의 적’이 됐다. ‘손실의 사회화, 이익의 사유화’라는 말은 이제 고상한 질책으로 여겨질 정도다. 이자 장사와 돈놀이는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익숙한 비난이다. 대통령은 서민들이 대출 원리금을 갚느라 ‘은행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고 했다.

 혁신을 앞세운 질책까지 나왔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6일 “올해 은행권 이자 이익이 60조원으로 역대 최고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며 “은행이 반도체나 자동차만큼 다양한 혁신을 해서 60조원의 이자이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인지 현실적인 판단을 하라”고 저격했다.

 비판의 논리를 쌓아가며 수위를 높여가는 은행 때리기는 현재진행형이다. 야당은 횡재세를 들고 나왔고, 정부와 금융당국은 대놓고 이자 깎아주기를 요구하고 나섰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20일 열린 금융위원회·금융감독원·금융 지주회사 간담회에서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해치지 않는 최대한 범위에서 코로나 종료 이후 높아진 이자 부담 증가분의 일정 수준을 직접적으로 낮춰줄 수 있는, 체감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달라”고 말했다. 규모에 대한 언질도 줬다. 횡재세 관련 법안을 보면 국민이 요구하는 수준을 알 수 있을 것이란 설명이다.

 자발과 상생을 앞세우긴 했지만, 여기서 방점이 찍힌 건 체감이다. 금융당국에 “직접 주머니에 돈을 넣어줄 방안을 가져오라고 했다”는 말까지 돌아다닐 정도다. 이미 낸 이자를 돌려주는 캐시백 형태의 지원 방안까지 논의되는 걸 보면,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닐 듯하다.

은행 이익 역대 최고 60조 예상    
“국민이 종인가” 금리 인하 압박
주주에겐 ‘약탈적 지원’ 될 수도

 은행에 칼을 빼 든 정부의 행보는 고금리의 부담에 시달리는 이들이 반색할 소식이다. 하지만 이런 선심성 정책 혹은 포퓰리즘은 맞지도 옳지도 않다. 차를 산 고객의 형편이 나빠졌다고 자동차 회사에 차값을 깎아주라고 정부가 나서진 않는다. 사적 계약이기 때문이다.

 은행 대출 계약도 다를 것이 없다. 나름의 사연은 있겠지만 집을 사고 주식 등에 투자하기 위해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사업을 키우고 운영하려 대출을 받은 이들은 그 대가(이자)를 지급하는 계약을 은행과 맺었다. 고정금리와 변동금리를 선택한 것도 금융소비자다. 요즘 말을 빌리자면 ‘누가 칼을 들고 협박(누칼협)’한 게 아니라, 각자의 계산기를 두드려 한 선택이다.

 물론 뛰는 금리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국가가 모른 척해서는 안 된다. 고금리에 어려움을 겪는 취약계층이 금융 시스템의 약한 고리라면 국가가 재정을 쓰고 지원해 이를 해결해야 한다. 상장사인 은행의 돈으로 생색을 내려는 건 은행 주주나 은행에 예금을 맡기고 수익을 기대하는 예금자 입장에서는 ‘약탈적 지원’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은행의 돈은 국민의 돈이 아닌, 예금을 맡긴 이들과 투자자의 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로 제한한 금리 인하 대상은 또 다른 논란의 불씨를 안고 있다. 왜 소상공인과 자영업자에게만 혜택을 주냐는 여론이 거세질 수 있어서다. 올해 3분기 기준 가계 빚은 1876조원에 이른다. 이자 부담에 시달리는 이가 한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만 콕 집은 ‘핀셋 지원책’은 ‘국민 편 가르기’ 논란으로 번질 소지가 다분하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을 놓고도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만약 은행권의 자발적 금리 인하를 요구한 이 조치가 총선을 겨냥한 카드라면, 금리 인하의 대상은 확대되고 규모는 더 커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표심을 흔들 만큼 대출자들이 ‘체감’할 수 있으려면, 금융당국의 주문과 달리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희생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또 있다. 이번 인하는 선례가 될 수 있다.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려울 뿐, 다음은 쉽다. 금리가 오를 때마다, 이자 부담을 호소하는 서민의 목소리는 더 커질 것이다. 그래야만 정부와 금융당국이 움직이고, 은행의 자발적 상생안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빚어질 외국인 투자자의 이탈, 은행의 건전성 악화와 주가 하락 등은 부수적인 피해다.

 야당이 띄운 횡재세를 지렛대 삼아 정부와 금융당국이 은행에 상생을 앞세운 자발적인 금리 인하를 압박하는 건 그야말로 환상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이 문제적 정책이 가져올 부작용은 언제나 그랬듯 누구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제 은행의 ‘깜짝 실적’은 정부가 보낸 고지서가 날아올 것이란 알람과 같고, 은행주를 팔아야 할 신호가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