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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의 ‘진지한 농담’…6만명 웃다가도 울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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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김범 작가는 일상에서 평범하게 접하는 사물을 활용해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2010). 조각 옆에 배치된 영상에서 강사는 돌에게 나는 법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리움미술관]

김범 작가는 일상에서 평범하게 접하는 사물을 활용해 우리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2010). 조각 옆에 배치된 영상에서 강사는 돌에게 나는 법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리움미술관]

“기발하고 유쾌하다” “피식 웃다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 “웃다가 또 울컥하다가”···.

영화나 개그 쇼를 보고 쓴 글이 아니다. 같은 미술 전시를 본 관람객들이 각자 SNS에 올린 감상 후기다. 서울 리움미술관(이하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김범(60) 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얘기다. 지난 7월 27일 개막한 전시는 4개월 여 이어진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오는 12월 3일 폐막을 앞두고 있다. 지금까지 이 전시를 찾은 관람객은 총 6만여 명. 한국 대표 동시대 미술에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작가를 폭넓고 깊이 있게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범 작가는 대중에게는 생소하지만 미술계에선 ‘큐레이터들이 좋아하는 예술가’로 통한다. 관람객 중엔 그의 전시를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뉴욕현대미술관(MoMA), 홍콩 M+ 등 세계 유수 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이미 소장하고 있다. 또 작가는 좀처럼 전시도 자주 열지 않아 마지막 국내 전시가 13년 전이었다. 전속 갤러리도 없다.

1963년 생인 김범은 서울대 미대,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NSV)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서울 세종로에 서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1928~1986) 조각가와 지난달 10일 작고한 김남조(1927~2023) 시인 부부의 아들이다.

이번 전시는 초기 회화부터 해외 소장품 등 회화·조각·설치·영상 등 총 70여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작품들은 우리가 미술관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들과 거리가 멀다. 소박하고 덤덤해 보이지만, 쌉쌀한 유머로 무장한 작품들이다.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2010). 이은주 기자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2010). 이은주 기자

이를테면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이란 작품이 있다. 뭉툭하게 잘린 나뭇가지 위에 놓은 돌멩이 하나, 그 옆에 강의 영상이 켜진 작은 모니터가 전부다. 알고 보니 영상 속 인물은 돌에게 나는 법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결국 그 돌은 나는 법을 깨우쳤을까, 그 돌은 아직도 자신이 새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작가가 관람객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돌한테 들려주기 위해 정지용의 시를 낭송하는 사람(‘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2010), 배를 앉혀 놓고 지구가 육지로만 돼 있다고 가르치는 학자(‘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 2010)도 보인다. 작가는 이렇게 사물들과 강의 영상을 나란히 배치한 연작 ‘교육된 사물들’로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교육 현실을 비튼다.

관객들을 더 웃게 하는 작품으론 ‘노란 비명 그리기’(2012)가 있다. 화면 안에선 강사(배우)가 붓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한 획씩 추상화 그리는 법을 가르친다. 그는 “비명에도 분노와 공포, 기쁨과 슬픔 등 여러 종류가 있다”며 마치 캔버스에 영혼을 불어넣듯이 비명을 지르며 캔버스에 색을 칠해 나간다. 영상은 결국 “어때요. 참 쉽죠?”라는 능청스러운 말로 마무리된다. 창작의 비애 혹은 애환, 현대미술의 소통 가능성 등 다양한 주제를 던진 열린 구조의 퍼포먼스로 읽힌다.

전시 제목 ‘바위가 되는 법’은 작가의 아티스트 북 『변신술』(1997) 중 독자에게 바위가 되는 법을 지시문으로 적은 데서 따왔다. 내용은 이런 식이다. “한 장소를 정하되 가능하면 다른 바위가 많은 곳에 자리 잡으면 도움이 된다” “움직이지 않고 숨소리를 죽인다” “모든 계절과 기후의 변화를 무시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온갖 정보와 자극에 둘러싸인 현대인의 삶을 역설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찬찬히 돌아보면 작품 하나하나가 ‘진지한 농담’ 같다.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 리움 부관장은 “김범의 작업은 ‘보이는 것’과 그 ‘실체’의 간극을 드러내고 있다”며 “매우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재료를 사용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의심하고 다시 돌아보게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전시엔 매일유업의 모기업인 매일홀딩스 소장품이 상당수 나와 있다.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2010),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2010), 회화 ‘노란 비명’(2012) 등이다. 매일홀딩스 김정완 회장은 김범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북 고창에 상하농원을 조성하며 마스터플랜을 예술가인 그에게 맡겼다.

방탄소년단 RM(본명 김남준)은 개막 당시 개인 SNS 계정을 통해 “최근 본 전시 중 제일 재미있었다. 제 소장품 한 점도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소장품이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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