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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 위에 돌멩이 하나…6만명이 웃다가 숙연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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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 영상 속 강사는 돌에게 날으는 법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뉴시스]

김범,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 영상 속 강사는 돌에게 날으는 법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다. [뉴시스]

김범의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영상 속 인물은 계속 정지용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김범의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영상 속 인물은 계속 정지용의 시를 낭송하고 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김범,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 2010, TV 모니터에 단채널 비디오(21분 8초), 개인 소장. 이의록, 최요한 촬영.[사진 리움미술관]

김범,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 2010, TV 모니터에 단채널 비디오(21분 8초), 개인 소장. 이의록, 최요한 촬영.[사진 리움미술관]

"기발하고 유쾌하다" "피식 웃다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 "웃다가 또 울컥하다가"···.

리움미술관 김범 개인전 #전시 자체가 "진지한 농담" #평범한 사물로 사회 비평 #"한국 동시대미술 주요 작가"

영화나 개그 쇼를 보고 쓴 글이 아니다. 같은 미술 전시를 본 관람객들이 각자 SNS에 올린 감상 후기다. 서울 리움미술관(이하 리움)에서 열리고 있는 김범(60)개인전 '바위가 되는 법' 얘기다. 지난 7월 27일 개막한 전시는 4개월여 이어진 대장정을 마무리하고 오는 12월 3일 폐막을 앞두고 있다. 지금까지 이 전시를 찾은 관람객은 총 6만여 명. 지난 상반기 뜨거운 호응을 끌어낸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 개인전과 나란히 비교할 순 없지만, 미술계에선 이번 전시야말로 "의미 있는 전시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한국 대표 동시대미술에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작가를 폭넓고 깊이 있게 조명했다는 점에서다.

한국 동시대미술 대표 작가, 김범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작가 이름이 대중에게는 생소하지만 미술계에선 '큐레이터들이 좋아하는 예술가'로 통한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관람객 중엔 그의 전시를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뉴욕현대미술관(MoMA), 홍콩 M+ 등 세계 유수 미술관은 그의 작품을 이미 소장하고 있다. 또 작가는 좀처럼 전시도 자주 열지 않아 마지막 국내 전시가 13년 전이었다. 전속 갤러리도 없다.

이번 전시는 초기 회화부터 해외 소장품 등 국내에서 좀체 볼 기회가 없었던 작품을 포함해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총 70여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작품들은 우리가 미술관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것들과 거리가 멀다. 작가는 아예 관람객의 기대를 배신하기로 작정한 듯이 탁자 위에 얹은 돌멩이, 칠판 앞에 학생들처럼 줄줄이 앉힌 주전자와 분무기와 선풍기 등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소박하고 덤덤해 보이지만, 쌉쌀한 유머로 무장한 작품들이다.

우리는 바위인가, 새인가  

김범,'임신한 망치'.1995, 목재, 철 , 5 x 27 x 7cm. 개인 소장. 이의록, 최요한 촬영. .[사진 리움미술관]

김범,'임신한 망치'.1995, 목재, 철 , 5 x 27 x 7cm. 개인 소장. 이의록, 최요한 촬영. .[사진 리움미술관]

리움미술관 김범 개인전 전시장 전경. [뉴시스]

리움미술관 김범 개인전 전시장 전경. [뉴시스]

'노란 비명그리기' 영상의 한 장면. 강사가 각기 다른 소리를 지르며 그림을 그린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노란 비명그리기' 영상의 한 장면. 강사가 각기 다른 소리를 지르며 그림을 그린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를테면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이란 작품이 있다. 뭉툭하게 잘린 나뭇가지 위에 놓은 돌멩이 하나, 그 옆에 강의 영상이 켜진 작은 모니터가 전부다. 알고 보니 영상 속 인물은 돌에게 나는 법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결국 그 돌은 나는 법을 깨우쳤을까', '그 돌은 아직도 자신이 새라고 믿는 것은 아닐까'. 마치 작가가 관람객을 향해 이런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돌한테 들려주기 위해 정지용의 시를 낭송하는 사람('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2010), 배를 앉혀 놓고 지구가 육지로만 돼 있다고 가르치는 학자(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 2010)도 보인다. 작가는 이렇게 사물들과 강의 영상을 나란히 배치한 연작 '교육된 사물들'로 우리 사회의 부조리한 교육 현실을 비튼다.

관객들을 더 웃게 하는 작품으론 '노란 비명 그리기'(2012)가 있다. 화면 안에선 강사(배우)가 붓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한 획씩 추상화 그리는 법을 가르친다. 그는 "비명에도 분노와 공포, 기쁨과 슬픔 등 여러 종류가 있다"며 마치 캔버스에 영혼을 불어넣듯이 비명을 지르며 캔버스에 색을 칠해 나간다. 영상은 결국 "어때요. 참 쉽죠?"라는 능청스러운 말로 마무리된다. 창작의 비애 혹은 애환, 현대미술의 소통 가능성 등 다양한 주제를 던진 열린 구조의 퍼포먼스로 읽힌다.

소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관점에서 보이는 장면을 그린 '무제'(1995), 구불구불한 산의 능선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열쇠의 골을 확대해 그린 '현관 열쇠'(2001)도 눈에 띈다. 대형 캔버스에 미로 퍼즐을 그린 ‘친숙한 고통’은 미로 이미지를 통해 삶의 난관, 사람들이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은유한 작품으로 꼽힌다.

전시 제목 '바위가 되는 법'은 작가의 아티스트 북 『변신술』(1997) 중 독자에게 바위가 되는 법을 지시문으로 적은 데서 따왔다. 내용은 이런 식이다. "한 장소를 정하되 가능하면 다른 바위가 많은 곳에 자리 잡으면 도움이 된다" "움직이지 않고 숨소리를 죽인다" "모든 계절과 기후의 변화를 무시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온갖 정보와 자극에 둘러싸인 현대인의 삶을 역설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김범, '현관열쇠', 2001, 캔버스에 아크릴, 22 x 33.5cm, 개인 소장. [사진 리움미술관]

김범, '현관열쇠', 2001, 캔버스에 아크릴, 22 x 33.5cm, 개인 소장. [사진 리움미술관]

김범, '두려움 없는 두려움', 1991, 종이에 잉크, 연필. 이의록, 최요한 촬영. [사진 리움미술관]

김범, '두려움 없는 두려움', 1991, 종이에 잉크, 연필. 이의록, 최요한 촬영. [사진 리움미술관]

찬찬히 돌아보면 작품 하나하나가 '진지한 농담' 같다. 이를 통해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전시를 기획한 김성원 리움 부관장은 "김범의 작업은 '보이는 것'과 그 '실체'의 간극을 드러내고 있다"며 "매우 사소하고 평범해 보이는 재료를 사용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의심하고 다시 돌아보게 한다"고 말했다.

김 부관장은 이어 "김범은 1990년대 한국 동시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작가"라고 강조했다. 리움이 해외 미술 전문가들이 한국을 대거 방문한 9월을 포함해 장장 4개월에 걸쳐 그의 전시를 열어온 것도 이 작가를 국내외에 알려보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김범은 누구? 

1963년 생인 김범은 서울대 미대, 뉴욕 스쿨 오브 비주얼 아트(NSV) 대학원을 했다. 그는 서울 세종로에 서 있는 충무공 이순신의 동상을 제작한 김세중(1928~1986) 조각가와 지난달 10일 작고한 김남조(1927~2023) 시인 부부의 아들이다.

한편 이번 전시엔 해외 미술관 소장품과 함께 매일유업의 모기업인 매일홀딩스 소장품이 상당수 나와 있다.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2010),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2010), 회화 ‘노란 비명'(2012) 등이다. 매일홀딩스 김정완 회장은 김범 작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북 고창에 상하농원을 조성하며 마스터플랜을 예술가인 그에게 맡겼다. 작가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방탄소년단 RM(본명 김남준)은 개막 당시 개인 SNS 계정을 통해 "최근 본 전시 중 제일 재미있었다. 제 소장품 한 점도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소장품이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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