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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든 동네 뒷산이든 산 오르며 겸손·인내 배웠으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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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호 20면

산악계 산 역사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 회장

한국 산악계의 대부로 불리는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이 서울 청담동 집무실 입구에 있는 에베레스트 사진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김상선 기자

한국 산악계의 대부로 불리는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이 서울 청담동 집무실 입구에 있는 에베레스트 사진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김상선 기자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킹콩빌딩’이 있다. 등산 배낭을 멘 거대한 킹콩이 빌딩을 올라가는 모습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곳에 이인정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의 집무실과 그가 키워낸 (주)태인이 있다.

이 회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산악계의 대부’다. 1980년 동국산악회를 이끌고 마나슬루 한국 초등을 이끌었고, 한국등산학교 교장(2000~08년), 대한산악연맹 회장(2005~16년), 현재 아시아산악연맹 수장으로 한국 산악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그는 지난 9월 대한민국 산악대상을 받았고, 지난해 국민훈장 모란장도 수훈했다. 최근에는 국립산악박물관 구술조사보고서를 통해 한국 산악 역사의 큰 물줄기를 정리했다.

대학 산악부 이끌고 마나슬루 등정

까까머리 시절 이인정에게 인왕산은 놀이터이자 훈련장이었다. 암벽등반을 따로 배운 적이 없어 막무가내로 하다 사고를 당할 뻔한 적도 많았다. 중동고에서 산악부 선배들 어깨너머로 등반의 기초를 익혔다. 꺼끌꺼끌한 삼줄을 자일 삼아 바위에 등반 루트를 만들기도 했다.

이인정이 등산 장비 구하러 베트남전에 지원한 스토리는 산악계의 전설이다. 이 회장은 “친구가 ‘여기 오면 최신 등산 장비를 잔뜩 구할 수 있다’고 해서 백마부대에 자원했는데 가자마자 후회했죠. 구정 공세로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는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었어요.”

이인정은 소원대로 등산장비를 잔뜩 안고 귀국길에 올랐고, 목숨값으로 가져온 장비들을 산악부 친구와 선후배에게 나눠줬다.

1969년 2월,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10동지 조난사고’가 발생했다. 한국산악회 히말라야 원정 훈련대가 동계 훈련을 하던 중 베이스캠프에서 눈사태를 만나 10명이 희생됐다. 훈련대원이었던 이인정은 2개조 중 대청봉으로 이동하는 조에 속해 목숨을 건졌다.

이 회장은 “몇 달을 자포자기해서 살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어요. ‘고인들을 위해서도 올바르게 살고 산악 운동에 앞장서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겨울 고산 등반에 대해 무지했던 게 사고로 이어졌고, 체계적인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어요”라고 회고했다. 이런 자각이 국내 최초의 산악 잡지인 『월간 산』 창간으로 이어졌다. 창간 멤버였던 이인정은 카메라를 들고 전국 산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기사도 썼다.

이인정은 1980년 동국대 원정대를 이끌고 마나슬루(8163m) 등반에 성공한다. 1970년대 국내 원정대가 세 차례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산악인과 셰르파 16명의 목숨을 앗아간 ‘죽음의 봉우리’를 대학 팀이 오른 것이다. 이 회장은 “대학 산악부에서 자비로 원정대를 꾸려 성공했다는 자부심이 엄청났어요.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감자만 삶아먹게 해서 대원들에게 미안했죠”라고 말했다.

이인정 대장은 마나슬루 성공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많은 자료를 인쇄소에 넘겼는데, 화재로 모두 소실됐다. 그런데 올해 초 동국대 산악부 자료 박스 안에서 이인정의 등반 당시 노트를 발견했다. 내년 4월이면 마나슬루 등반일지가 출간된다.

이 회장은 친동생 같고 자식 같은 후배들을 히말라야에서 잃었을 때가 가장 가슴 아팠다고 했다. 히말라야에서 조난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사람들은 이 회장만 쳐다봤다. 그는 늘 사고 수습에 앞장섰다. 현장으로 날아가 헬기를 수배해서 띄우고, 수습이 가능한 시신은 어떻게든 국내로 송환했다. 장례위원장도 늘 그가 맡았다.

“산악박물관은 고미영이 남긴 선물”

이 회장이 가장 아꼈던 후배가 2011년 안나푸르나에 잠든 박영석이다. 1980년 동국대 마나슬루 원정대의 카 퍼레이드를 보고 박영석은 ‘산악인의 길을 걷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영석이는 정이 많고 정직한 친구였어요. 히말라야 14좌를 절반쯤 오르고 나서는 정신이 흐트러지고 술을 많이 먹고 다녔어요. 울면서 야단을 친 적도 있었죠”라고 회고했다.

여성 산악인 고미영은 2009년 7월 낭가파르밧 등정에 성공한 뒤 하산길에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파키스탄으로 대한산악연맹 구조팀을 보내 천신만고 끝에 시신을 수습해 국내로 송환했다. 이 회장은 빈소에서 산림청장에게 “우리나라도 제대로 된 산악박물관이 있어야 한다”고 설득했고, 결국 강원도 속초에 국립산악박물관이 지어졌다. 자신이 모아온 귀중한 자료와 장비들을 기증한 이 회장은 “국립산악박물관은 고미영이 우리에게 남긴 선물”이라고 말한다.

이 회장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게 “처가 덕 봤다”는 말이다. 이인정은 이화여대 산악반 출신인 구혜정과 1972년 결혼했다. 구혜정은 LG그룹 오너가(家)의 딸이었다.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이 이인정의 장인이다. 이 회장은 “집안에 대해서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어요. 나중에 처가에서 알게 되면서 처남 될 사람들이 나를 따라붙기 시작하더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산악부 활동을 하면서 정을 쌓아갔고, 결혼하고도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지금까지 편하게 산에 다닐 수 있었던 거죠”라고 했다.

이 회장은 아시아산악연맹 회의에서 네팔 관광성 간부에게 “당신들은 관광사업을 위해 돈 받고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만 있다”고 항의한 적이 있다고 했다. 에베레스트에서 날씨가 나쁘거나 산소가 떨어지면 죽음의 지대가 되는데, 수입을 위해 상업등반대의 등반허가를 무리하게 내 주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얼마나 높은 산을 얼마나 많이 올랐나 하는 건 이제 큰 의미가 없어요. 히말라야 고산이든 동네 뒷산이든 산에 오르는 경험을 통해 인생에서 겸손하고 인내하는 법을 배우면 좋겠습니다”라고 이 회장은 말했다.

그는 1990년부터 34년간 태인체육장학금을 만들어 꿈나무 626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 회장의 호는 여산(與山)이다. 산에서 배운 겸손과 나눔을 산과 함께 세상에 실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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