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극약 처방 땐 부작용…식사·운동·뇌활동 ‘중도의 길’ 지켜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65호 28면

러브에이징

“극과 극은 만난다.(Extremes Meet)”

대학생 때 청강했던 ‘러시아 혁명사’ 수업에서 담당 교수는 이 서양 격언을 인용하면서 황제가 부와 권력을 독점했던 제정 러시아의 극우 정권 차르주의(Tsarism)는 볼셰비즘(Bolshevism)이라는 급진 좌익 세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양극단의 조우는 얼핏 들으면 난해한 화두처럼 느껴지나 ‘극단적 성향’을 공유하기 때문에 공통점이 무척 많다. 극과 극이 잘 통하는 이유다. 고대 로마 시대 변호사이자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도 ‘극단적인 법 적용은 극단적인 부정의(不正義)가 된다(summum ius, summa iniuria: 법이 많을수록, 정의는 적다)’는 말로 한쪽으로 치우친 균형 잃은 판단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의사도 응급 상황 때만 극약 처방

의학적으로도 단기간에 극적 효과를 보는 ‘극약 처방’은 생사를 오가는 응급상황에서만 사용한다. 또 치명적인 부작용이 뒤따르는 상황도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작용-반작용 법칙과 맥을 같이 한다.

일례로 심한 구토나 설사로 응급실을 찾은 환자는 전해질 불균형이 심하다. 이때 경험이 일천한 의사가 환자 상태를 신속하게 호전시키기 위해 빠르게 전해질을 투여하면 혈액 검사는 정상화되더라도 환자는 혼수에 빠지기 쉽다. 올바른 치료는 1리터 링거액에 전해질을 적당히 희석한 뒤 환자 상태를 관찰하면서 조심스레 투여하는 게 원칙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일상에서도 살을 빼겠다고 굶다시피 하면서 체중을 급속히 줄이다간 이내 요요 현상이 발생해 체중 감량도 실패하고 체지방만 늘어나는 슬픈 경험을 흔히 한다.

질병 치료뿐 아니라 특별한 위기 상황이 아닌 한 매사에 극단적인 방법은 피하고 균형 잡힌 해결책을 찾는 게 좋다. 싯다르타 부처가 6년의 수행을 마치고 깨달음을 얻은 뒤 가장 먼저 설파한 진리도 고락(苦樂)을 떠나 심신이 조화를 이룬 ‘중도(中道)’의 길이다. 현악기를 아름답게 연주하려면 줄이 팽팽하지도, 느슨하지도 않아야 하는 것과 같다(『석가』 한국불교연구원).

중도의 원칙은 100세 인생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심신 건강 관리에도 적용된다. 극적 효과를 기대하는 비법(?)을 멀리하고, ‘적절한’ 식사·운동·두뇌 활동·취미생활·마음수련 등 건강 상식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순해 보이는 진리를 실천하기는 쉽지 않다. 왜 그럴까.

100세 시대는 19만년 동안 지구촌살이를 한 사피엔스가 최초로 경험하는 상황이다. 2000년 전만 해도 당시 최고의 문명국인 로마 제국의 평균 수명은 21세다. 출생아 절반이 영유아기에 사망했으며 5세까지 생존하면 평균 42세까지 살았다. 불과 200년 전인 19세기 조선의 양반 가문도 20세까지 생존한 남성의 평균수명이 52.6세였다. 일반 백성의 수명은 이보다 훨씬 짧기 마련이다. 과식할 기회가 생기면 최대한 식탐을 발휘해 배불리 먹고 즐기는 게 짧은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적절한 식습관은 장수 시대에 당뇨병·심장병 등 만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후천적으로 새롭게 익혀야 할 행동지침인 셈이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하는 21세기 인류의 뇌도 합리성을 추구하는 대뇌의 명령보다 본능에 더 빠르고 충실하게 반응한다. 본능은 사피엔스가 선사시대부터 천재지변과 맹수의 위협을 극복하는 여정에서 뇌에 각인시킨 태생적 특징이다. 흔히 본능 하면 식욕이나 성욕, 수면욕을 떠올리지만 위기 상황이 되면 다양한 생존 본능이 작동한다. 희박한 위험도 극도로 회피하는 공포 본능, 좋은 일보다 나쁜 소식에 귀 기울이는 부정 본능, 문제의 원인보다 악당을 찾아 비난하고 싶어하는 본능, 넓은 중간지대는 간과한 채 양극단만 쳐다보고 비교하는 간극 본능 등 종류도 다양하다(『팩트풀니스』 한스 로슬링著). 2008년 국내에서 있었던 광우병 파동은 공포 본능이 집단적 폭발성을 보인 단적인 예다.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도 일단 본능이 작동하면 이성은 설 자리가 없다. 중도의 평정심을 찾아야 한다는 말은 공염불일 뿐이다.

반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한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극단적 쏠림 현상이다. 사회의 다양한 가치가 조화를 이루는 중도의 진리는 철저히 배제된다. 극에서 극을 달리는 사회는 불안하고 구성원들은 불행하다. 형편이 좋아져도 더 잘사는 사람만 계속 눈에 띄기 때문이다. 결과는 반세기만의 세계 1위의 초저출산율(1970년 4.5명→2020년 0.84명)과 급속한 초고령화(1970년 기대 수명 62.3세→2020년 83.5세) 현상을 모두 가진 국가가 됐다. 죽음의 본능(타나토스, Thanatos)마저 극을 향해 자살률은 20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1위다.

광우병 파동, 중도 평정심 잃은 사건

최근에는 국내 마약 사범까지 증가 추세다. 극에서 극으로 달리는 국민성을 고려하면 마약 안전지대에서 순식간에 마약 소비국으로 전락할 위험성은 상존한다. 마약은 개인의 파멸을 넘어 국가의 몰락을 초래하는 극약이다. 마약 중독자를 제대로 줄이려면 강력한 사법 조치뿐 아니라 환자 재활, 청소년기 위험 요소〈표 참조〉 관리 등 여러 대책을 균형 있게 지속해서 시행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모든 가치관이 양극단을 오가는 병든 모습이며 미래는 희망적이지 않다. 과연 극단적 성향에서 벗어나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사회는 도래할 수 있을까. 아마도 중도의 진리를 믿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행복해지는 개인이 많아지면 조금씩 균형 잡힌 사회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황세희 연세암병원 암지식정보센터 진료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