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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덕노의 식탁 위 중국] 제비집 수프는 왜 최고 요리가 됐을까?

중앙일보

입력

제비집 수프. 사진 셔터스톡

제비집 수프. 사진 셔터스톡

청말의 최고 권력자로 나라를 망국으로 이끈 대표적 인물인 서태후의 음식 사치는 유명하다. 북양함대 건설에 들어갈 막대한 군비를 빼돌려 별궁인 이화원을 건설한 서태후는 이곳에 머물며 온갖 사치를 부렸는데 먹는데도 엄청난 비용을 썼다. 한번 식사에 백은 100냥을 소비했다는데 이 돈은 당시 평민들의 일 년 수입을 넘는 액수였다고 한다.

한 끼 식사를 위해 준비한 요리가 대략 100가지였고 이중 실제 식탁에는 30여 가지가 올랐는데 정작 서태후가 젓가락을 대는 요리는 3~4가지에 불과했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을 먹었길래 음식 사치가 대단했다는 소문이 났을까?

서태후의 서른한 살 생일상의 경우 24가지 요리가 차려졌는데 후식과 국수를 제외하면 주로 오리고기, 돼지고기였다. 얼핏 보면 소문과는 달리 조촐해 보이지만 내막은 다르다. 대부분 요리를 귀하디귀하다는 바다제비집을 소스로 삼아서 조리했기 때문이다. 서태후의 음식 사치가 대단했다고 하는 이유다.

중국 음식 중에서도 최고 요리로 꼽는 제비집(燕窩) 요리는 많이 알려진 것처럼 금사연(金絲燕)이라는 바다제비의 집을 재료로 만든다. 지푸라기나 풀로 집을 짓는 보통 제비와 달리 바다제비 집은 해초와 체내에서 분비된 체액으로 짓기 때문에 손질해 식용으로 쓴다. 바다제비집은 중국 남부와 동남아 등지에서 소량만 채취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주로 베트남 등지에서 조공품으로 진상했다.

역대 청나라 황제가 좋아했기에 심지어 중국과 교역을 원했던 네덜란드에서는 건륭 60년인 1795년, 바다제비집 100근을 구해 보내며 중국과 거래를 추진했을 정도다.

이렇게 귀한 바다제비집을 오리고기를 삶고 찌는 소스로 썼으니 서태후의 식사비용으로 얼마나 돈이 많이 들어가고 그 요리가 얼마나 특별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혹자는 바다제비집을 요리해 먹는 것도 아니고 소스로 썼으니 서태후의 낭비가 정말 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바다제비집은 이렇게 조리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으로 알려진 제비집 수프 역시 내용을 보면 바다제비집을 직접 끓여 먹는 수프가 아니다. 바다제비집으로 만든 육수를 베이스로 상어지느러미인 샥스핀, 해삼, 죽순, 전복, 버섯 등 다른 재료를 조리한 음식이다. 귀하다는 바다제비집을 왜 이런 식으로 요리하는 것일까?

최고급 재료는 그 자체의 맛을 즐기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바다제비집은 굳이 다른 재료와 함께 조리해야만 한다. 이유는 아무 맛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단독으로는 요리할 수 없다.

그러면 아무 맛이 없다는 바다제비집이 어떻게 최고의 식품이 됐을까? 그 이유를 청나라 학자이자 미식가였던 원매가 쓴 『수원식단』에서 찾을 수 있다. “제비집은 마치 평범한 사람(庸陋之人)과 같아서 그 자체만으로는 맛이 없고 반드시 다른 재료에 의지해야만 제맛을 낸다.”

비유하자면 밥과 같다. 쌀로 지은 밥은 그 자체만으로는 별맛이 없다. 맨밥은 먹기 힘들지만, 반찬과 함께 먹으면 최고의 맛을 낸다. 밥이 주식이 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맛이 없기 때문이다. 바다제비집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맛이 없기에 다른 재료와 조화를 이루어 그 재료의 맛을 최고로 만들어 주기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지미무미(至味無味), 무미(無味)야 말로 최고의 지극한 맛(至味)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원매는 제비집에 빗대어 귀로 음식을 먹지 말라고 했다(戒耳餐). 소문만으로 지레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니 음식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무 맛이 없지만 그래서 최고의 맛이라는 바다제비집은 언제부터 중국 최고요리라는 말을 듣게 됐을까?

먼 옛날부터 산해진미로 알려졌을 것 같지만 바다제비집 요리가 정작 유명해진 것은 청나라 이후부터이니 불과 250년 남짓이다.  우리 문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조선 말기 고종 때 『임하필기』에도 “중국의 훌륭한 요리 중에 계수나무 벌레(桂蟲)와 제비집 요리(燕窩)가 있느니 계수나무 벌레는 「한사(漢史)」에 보이지만 제비집은 근래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명나라 때는 별로 유명하지 않던 제비집 요리가 최고의 중국 요리가 된 것은 청나라 황제와 귀족이 즐겨 먹었기 때문이다.

전해지는 말로는 청의 전성기를 이룩한 건륭황제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면 제비집 수프 한 그릇으로 공복을 달래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건륭 이래로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 부의까지 첫 식사를 제비집 수프나 제비집 죽으로 시작했다는 것이다.

청나라 귀족들은 왜 이렇게 특별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닌 제비집 요리에 빠졌던 것일까?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다만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만주족 출신들이었기에 먼 바다인 동남아 중에서도 흔치 않았던 음식 재료인 제비집의 희소가치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싶다. 드물면 귀하다(物稀爲貴)라고 했으니 대륙 정복으로 사치가 극에 달했던 청의 미식가들이 만들어 낸 최고 요리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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