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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4대에 걸친 충절? 살아남은 남편들, 자결한 부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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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김류의 가족과 병자호란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경기 안산시 단원구에는 ‘사세충렬문(四世忠烈門)’이라는 역사 유적이 시민 생활 공간 속에 자리하고 있다. 한 집안의 사대(四代)가 충(忠)과 열(㤠)로 역사에 이름을 올린 것인데, 주인공은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김여물(金汝岉·1548~1592)과 병자호란 때 적을 피해 자결한 그 집안 여인들이다.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 투신한 김여물

김여물은 신립(申砬)의 종사관으로 출정하는데, 패전의 책임으로 주장(主將)과 함께 강에 투신하여 순국했다. 그로부터 45년, 피난지 강화도에서 측실 신씨와 자부 유씨, 손부 박씨, 증손부 정씨가 일시에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김여물의 행적이야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져 왔지만 네 여성의 경우는 ‘절개를 위해 목을 매어 죽었다’는 일괄적인 서술로 전해 올 뿐이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각 여성이 남긴 말은 무엇인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당시 강화도에서 ‘사절(死節)’한 여성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은데, 유독 이들에게만 가족 단위의 정려(旌閭) 공간이 주어진 것도 주목을 끈다. 서로 고부 사이인 이들은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아내인가.

안산시 ‘사세충렬문’의 아이러니
국가가 기린 ‘명예로운 집안’ 징표

왜란·인조반정·호란 ‘격변의 시간’
시류 잘 타며 ‘의인’이 된 사대부

집안 여인들엔 “절개 위해 죽어라”
역사에 남은 건 ‘여인 4대’의 희생

김여물의 며느리 유씨는 외아들 김류(金瑬·1571~1648)의 아내로 판서와 관찰사를 지낸 유근(柳根)의 딸이다. 김류의 외아들 경징(慶徵)의 아내는 홍문관 박사를 지낸 박효성(朴孝誠)의 딸이다. 김경징의 외아들 진표(震標)의 아내는 인열왕후의 질녀이자 부제학을 지낸 정백창(鄭百昌)의 딸이다. 그리고 김여물의 측실(김류의 서모)은 순천부사를 지낸 신익(申翌)의 딸이다.

영의정 김류 집안에 시집온 여인들

임진왜란 때 순국한 김여물 장군과 병자호란 당시 자결한 이 집안 여인들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지은 사세충렬문.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있다. [사진 문화재청]

임진왜란 때 순국한 김여물 장군과 병자호란 당시 자결한 이 집안 여인들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지은 사세충렬문.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 있다. [사진 문화재청]

모두 최상층 신분의 딸들로 영의정 김류의 집안으로 시집온 며느리들이다. 영의정의 가족이기에 강화도로 피신할 수 있는 특혜를 얻은 것인데, 『강화지』에 의하면 이들뿐 아니라 많은 친인척이 함께 갔다. 이 여성들의 죽음이 나라의 자존심을 세워준 거룩한 행위라고 한다면, 하나같이 살아남은 남편들의 행적은 어떠했는가.

김류는 21세 때 아버지의 죽음을, 바로 다음 해에 어머니 박씨의 죽음을 겪는다. 충절지사 아버지의 공덕으로 참봉이 되었고, 무인 기골의 그가 정시 문과에 급제하면서 문무겸전의 능력자로 성장해간다. 무엇보다 52세에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이 되면서 이후 20여년 달권(達權)의 정치 감각과 실무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다만 그는 정치가로서의 주의나 이념보다는 시류에 영합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택하는데, 즉 척화(斥和)를 주장하다가 자신에게 책임이 올 것 같으면 주화(主和)로 돌아선다는 것이다.(『인조실록』 1637년 6월 21일)

게다가 나쁘지 않은 능력과 주어진 권력을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데 악용한다는 비판이 늘 따랐다. 아버지 김여물의 사적에 시비가 일자 국왕 인조에게 다시 정표해 주기를 청해 얻어내고(『인조실록』 1639년 3월 25일), 집안 여인들이 몰살한 강화도의 비극을 국가 차원의 추모 공간으로 만든 것 등이다. 그의 권력은 죽은 가족들을 명예롭게 한 것에 그치지 않고 외아들 김경징에게 권력과 명예를 안기고 싶어 무리수를 둔다. 자기 가족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대비되는, 이괄의 역모에 언급된 38인을 따져보지도 않고 모조리 사형시킨 것은 두고두고 시빗거리가 되었다. 많은 가족을 파멸시킨 행위와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아빠 찬스’로 고속 승진한 아들 경징

사세충렬문 현판. [사진 안산시]

사세충렬문 현판. [사진 안산시]

아들 김경징을 향한 김류의 ‘사랑’은 크고 작은 사건으로 되돌아왔다. 김경징이 과거에 급제한 정황이나 이후의 고속 승진, 강화도 수비 총대장으로 임명된 것 등은 아버지의 권력으로 초법적인 특혜를 받은 것으로 구설에 올랐다. 아들의 그릇이 아버지의 기대를 담아내지 못한 것이다.

김경징은 청군의 공격에 무사안일로 대처하다 정작 적군이 쳐들어오자 놀라 도주하여 강화도 함락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패전의 장수 수위를 다투었다. 김류 부자에게 책임을 묻는 상소에는 “김경징이 검찰사(檢察使)가 된 것은 김류가 스스로 천거한 것인데, 온 집안이 난리를 피하려는 계획이었다”고 했다. 왕은 “원훈(元勳)의 외아들을 차마 처형할 수 없다”고 하지만 결국 김경징(1589~1637)은 사사되고 그 아버지 김류는 탄핵당했다.(『인조실록』 1537년 9월 21일)

김여물 장군 묘소.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여물 장군 묘소.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와 함께 강화도 여인들의 행적이 흘러나왔다. 『속잡록』에는 김경징이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고, 김류의 처가 사람 12인과 김진표의 처가 사람 11명이 잡혀갔다고 한다. 『강화지』와 『인조실록』에 의하면 김진표는 아내 정씨를 다그쳐 자진케 하고,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적병이 성 가까이 왔으니 죽지 않으면 욕을 볼 것”이라고 겁박하여 자결토록 했는데, 진표 홀로 죽지 않았다. 즉 65세의 할머니 유씨, 40대의 어머니 박씨, 20대 초반의 아내 정씨가 일시에 자결한 것이다.

한편 ‘사세충렬문’의 한 주인공인 김여물의 측실 신씨는 당시 얼추 80여에 이른 고령이었다. 집안의 여자 어른으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택한 것인데, 그녀는 친정 부친 신익의 행적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무과 급제자 신익은 왜란 초기에 충청병마절도사로 군대를 통솔하던 중 적병이 몰려들자 먼저 도망가 버린다. 이에 10만 군사가 마치 산이 무너지고 하수가 터지는 듯 흩어져 버려 패전의 장수로 처단됐다.(『선조실록』 1592년 9월 18일)

도망치면서 목숨 건진 남편들

김여물 행실도.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18책으로 구성한 『동국신속삼강행 실도』(1617)에 실렸다.

김여물 행실도.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충신·효자·열녀의 행적을 18책으로 구성한 『동국신속삼강행 실도』(1617)에 실렸다.

이 가족의 역사는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그리고 병자호란이라는 조선의 굵직한 사건과 함께한 셈이다. 김상헌(1570~1652)이 이 가족을 일러 “충신과 열사는 국난을 만나면 자신을 바쳐 인(仁)을 이룬다”고 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그런데 강화도에서 일시에 자결을 선택한 아내들과 달리 그 남편들은 도망을 가면서까지 살기를 도모했다. 사람들은 자결로 몸을 지킨 아내와 구차히 살아남은 남편을 대비시키며 조롱기 있는 세평을 내놓았다.

김여물의 아들이자 영의정까지 지낸 김류 영정. [사진 안산문화원]

김여물의 아들이자 영의정까지 지낸 김류 영정. [사진 안산문화원]

아들로 인해 탄핵을 당한 김류가 1년이 지나 복권되자 가족의 명예 회복에 박차를 가한다. 아버지 김여물에게 정려를 내려줄 것을 청하던 바로 이 시점이다. 당대의 대가들에게 자신의 묘지명과 아버지의 신도비명을 예약하는데, 그의 뜻에 부응하듯 김육(1580~1658)과 김상헌(1570~1652)은 이 가족에게 날개를 달아주었다.

흥미롭게도 김육이 쓴 『김류묘지명』에는 강화도에서 자결한 부인의 평소 모습이 나온다. 이에 의하면 부인 유씨는 천부적인 자질이 영특했고, 많은 책을 읽어 윤리의식과 실용지식이 충만했다. 무엇보다 유씨는 인조반정 당시 “그대 부자(父子)가 충(忠)에 죽는다면 무슨 한이 있겠는가!”라고 하며 남편 김류와 아들 김경징을 반정의 대열에 합류시킨 장본인이다. 유씨의 일화는 집안에서 건넨 초안에 근거한 것이기에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손자 진표를 끝으로 집안 대 끊겨

 김류 신도비.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류 신도비.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77세의 김류가 세상을 떠나면서 손자 김진표(1614~1671)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자신의 아버지 김여물의 신도비명을 세우라는 것이었다. 김상헌은 자신이 신도비명을 쓰게 된 과정을 밝히고, 이 가족의 역사와 의미를 정성스럽게 기술했다. 즉 왜적에 맞선 김여물의 충절과 그 30년 뒤 충의의 군사를 일으켜 반정을 완수한 김류의 거사를 부각하며 부자(父子)의 이름이 저 천지와 함께 영원토록 전해질 것을 염원한다.

하지만 김류가 세상을 뜬 50년 후, 숙종의 조정에 어떤 보고가 올라온다. 손자 김진표를 마지막으로 이 집안의 대가 끊긴 것이다. “김류가 정사원훈(靖社元勳)인데도 자손이 잔미(殘微)하여 그 묘(墓)를 지키는 이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 나라에서 돌보아야 하겠습니다.”(『숙종실록』 1701년 5월 21일) 한 집안의 명예를 위해 기획된 ‘사세충렬문’이 공공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병자호란의 현장에서 기어이 살아남은 남자들은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가문의 명예를 위해 희생된 여자들은 기억의 공간에서 되살아났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광덕산 자락에 있는 ‘사세충렬문’이 그날의 아픔을 전하고 있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