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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사기 공화국에서 살아남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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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한동안 장안의 화제였던 이른바 ‘전청조 사건’은 뒷맛이 쓰다. 성(性)전환 의혹에 재벌 3세 거짓말까지 대중의 관심을 끌 소지가 많은 건 사실이나 흥미 위주의 보도가 너무 많았다. 사기(詐欺)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기 범죄는 지난해 32만 건에 달했다. 최근 5년간 5만 건 이상 늘었다. 대표적 범죄가 2006년에 처음 등장한 보이스피싱이다. 갈수록 피해가 커져 2021년에는 피해 금액이 7744억원까지 늘었다. 보이스피싱으로 하루 평균 21억원이 털리는 ‘사기 공화국’이다.

‘전청조’만의 문제 아닌 사기죄
하루 21억원씩 보이스피싱 털려
신뢰자본 훼손 국가경쟁력 하락

고학력자라고 안전한 게 아니다. 일단 휴대폰이 악성 앱에 감염되면 피해자가 거는 모든 전화를 범죄 조직원이 당겨 받을 수 있고, 범인이 발신하는 전화는 정상 번호로 표시된다. 경찰은 이를 보이스피싱의 가장 위험한 부분으로 꼽았다. 뭔가 의심스러워 검찰·경찰·금융감독원에 신고해도 범죄자들에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최근 충남경찰청은 1891명에게 총 1491억원의 피해를 준 보이스피싱 조직을 검거했다. 41억원을 뜯긴 의사도, 10억원을 털린 서울대 교수도 이런 식으로 당했다. 병합된 사건이 무려 5500건이다. 김종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경제범죄수사과장은 “단군 이래 최대 보이스피싱 사건”이라고 했다.

금융·통신 수법이 진화하면서 사기도 다양해졌다. 스마트폰과 핀테크의 발전으로 사기의 효율이 높아졌다. 오픈 뱅킹 서비스도 한몫했다. 본인 명의의 다른 금융기관 계좌를 모두 조회하고 이체할 수 있어서다. 가상자산 사기는 2017년 4674억원에서 2021년 3조1282억원으로 늘었다. 지난해 등장한 전세사기 피해는 2335억원이나 됐다. 전체 범죄 중 사기죄 비율은 올해 1~7월 23%를 넘어섰다. 반면에 절도 건수는 2015년부터 사기 건수보다 적어졌다. CCTV가 늘고 현금 보유가 줄어든 영향이다.

돈만 날리는 게 아니다. 사기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을 좀먹는다.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사기나 무고 같은 범죄가 우리나라에는 유난히 많다. 이런 불신 과잉 사회에선 거래를 위해 더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한다. 생판 남을 믿지 못하니 혈연·지연·학연에 의존하고 패거리 문화와 연고주의가 기승을 부린다. 그만큼 나라 경쟁력은 추락한다. 사기의 경제적 효과가 작지 않다.

사기죄가 국제화·고도화하면서 범인 잡기는 힘들어졌다. 비대면이 많아지면서 범인 영상을 확보하기 어려워졌다. 가상사설망(VPN) 같은 기법을 활용해 수사기관의 온라인 추적을 피하기도 한다. 사기 범죄 검거율이 2018년 75%에서 지난해 59%로 떨어졌다. 사기죄를 저지른 이들은 여차하면 해외로 튄다. 2020~2022년 국외 도피 사범의 52%가 사기죄였다. 서준배 경찰대 교수는 “사기꾼들은 로켓을 타고 날아다니는데, 중고차를 타고 쫓아가서는 잡을 수 없다”며 “사기꾼들의 범죄 의지를 억제할 수 있는 ‘심리적 CCTV’를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했다.

경찰도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보이스피싱의 중간 고리 역할을 하는 대포통장과 대포폰·유심을 집중 단속했다. 그 결과 대포통장 가격이 열 배로 뛰는 등 유통 가격이 크게 올랐다. 범행에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게 해서 범죄 발생을 억제하기 위함이다. 지난 9월엔 보이스피싱 통합신고·대응센터를 열었다. 피해 신고는 경찰, 지급 정지는 금융감독원, 범행 수단 차단은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으로 제각각이었던 사건 처리가 전화는 112, 인터넷은 ‘보이스피싱지킴이’ 사이트로 일원화됐다.

스스로 조심할 필요가 있다. 택배 배송조회 등 문자로 받은 링크는 열지 말아야 한다. 설령 눌렀더라도 파일 설치 팝업창이 뜰 때 ‘확인’을 누르지 않으면 괜찮다. 가족·지인이라도 전화통화만으로 돈을 보내주면 실수할 수 있다. 요즘 인공지능(AI)으로 얼굴이나 목소리를 위장하는 피싱 수법까지 등장했단다. 참 무서운 세상이다.

글=서경호 논설위원 그림=윤지수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