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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학과 '3300대 1' 인기…인도 이 대학, 경비원도 한국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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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자와할랄 네루대(JNU·네루대) 캠퍼스 안에선 아무나 붙잡고 한국어로 말 걸어보세요. 경비원들도 한국어를 잘 하고, 심지어 캠퍼스의 강아지들도 한국어 다 알아먹어요. 제가 필요 없을 겁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인도 수도 뉴델리에 위치한 인도 최고의 국립대인 네루대 방문에 앞서 이 학교 출신인 인도인 통역관이 한 말이다.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 네루대 캠퍼스엔 한국어 능통자가 즐비했다. 이미 인도 곳곳에서 “안녕하세요”, “한국 좋아요”와 같은 한국어를 구사하는 인도인들을 다수 만난 터였다.

하지만 네루대에선 “아휴, 먼 길 오시느라 피곤하셨겠어요. 어떻게, 시차 적응은 잘 마치셨어요?”와 같은 유창한 고급 한국어가 귓속에 꽂혔다. 인도는 물론 남아시아 전역에서 유일하게 한국어 박사과정이 개설된 고급 한국어 인력 양성소란 네루대의 명성이 실감 났다.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 자와할랄네루대의 중앙도서관 모습. 박형수 기자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 자와할랄네루대의 중앙도서관 모습. 박형수 기자

1995년 개설된 네루대 한국어학과의 학년별 정원은 30명이다. 해가 갈수록 학과의 인기가 높아져, 지난해 10월 가을학기 모집 때 지원자 10만 명이 몰려들어 3300대 1의 기록적인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네루대 내 언어계열 학과(독일어·프랑스어·스페인어·러시아어·일본어 등) 중 한국어학과 경쟁률이 가장 높았다.

니르자 사즈마달 네루대 한국어학과장은 “마감 뒤에도 추가 모집 문의가 계속 이어지고, 다른 언어 전공으로 입학한 학생들도 한국어과로 전과하는 경우가 잦다”면서 “결국 정원을 넘겨서 학년별 40명 내외로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네루대 캠퍼스를 찾아 한국어학과의 수업 현장을 살펴봤다. 또 한국을 향한 관심과 애정으로 뭉친 네루대 엘리트들을 직접 만나 진로에 대한 계획과 한국에 바라는 점 등 생생한 목소리도 들었다.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 자와할랄네루대의 한국어학과장인 니르자 사마즈달 교수가 학과장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형수 기자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 자와할랄네루대의 한국어학과장인 니르자 사마즈달 교수가 학과장실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형수 기자

학부 3년간 한자 1000자 익혀…"고급 인재 육성"

“이 글자는 ‘때 시(時)’에요. 총 10획으로 이뤄졌죠. 쓰는 순서는 이렇습니다. 자, 이 글자가 들어간 한국어 단어는 뭐가 있는지 말해보세요.”

산자이 쿠마르 자 교수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스무명 남짓한 학생들의 입에선 “동시(同時)” “시차(時差)” “시계(時計)” 등 한국어 단어가 줄줄이 쏟아졌다. 자 교수는 “그럼 ‘시차’의 의미가 뭐죠?” “‘동시’의 앞 글자인 ‘동’은 어떤 한자어죠?” 등의 추가 질문을 계속 던졌고 학생들은 “JET LEG” “같을 동”이라며 척척 답했다.

네루대의 한자 수업은 학부생을 대상으로 진행되며, 졸업할 때까지 1000자 정도를 읽고 쓸 수 있는 수준으로 익힌다. 자 교수는 “네루대 한국어학과는 일반적인 수준의 한국어 구사자가 아니라 학술적·전문적 수준의 고급 사용자를 양성하는 기관”이라며 “이를 위해 한자 교육은 필수”라고 설명했다.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대 자와할랄 네루대 한국어학과의 한자 수업 모습. 이곳 학생들은 학부 졸업 전까지 한자 1000자를 뗀다. 박형수 기자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대 자와할랄 네루대 한국어학과의 한자 수업 모습. 이곳 학생들은 학부 졸업 전까지 한자 1000자를 뗀다. 박형수 기자

옆 강의실에선 한국 사회에 대한 시사 토론이 한창이었다. 한때 집단주의가 팽배했던 한국이 개인주의로 변화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원인에 대해 토론하는 수업이었다. 한 여학생은 “한국과 인도는 가족 중심 문화, 집단 중심 사고 등 비슷한 점이 매우 많아서 흥미롭다”면서 “한국 사회의 변화상을 보면서 인도의 미래도 (한국과 비슷하게) 예측해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시사 토론 수업을 담당하는 라훌 라지 교수는 “한국의 방송 뉴스나 신문 기사를 그대로 가져다 교재로 삼기도 하고, 최신 논문을 활용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대 자와할랄 네루대 한국어전공 학생들의 토론 수업 모습. 박형수 기자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대 자와할랄 네루대 한국어전공 학생들의 토론 수업 모습. 박형수 기자

한국어 논문 등 자료 접근 어려워

네루대는 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한국어 전공으로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모두 갖춘 대학이다. 박사 과정생들의 연구 주제도 다양하다. 크리샨 깐드 자는 ‘한국과 인도의 다문화 정책에 대한 사회·문화적 비교’를, 라훌 쿠마르는 ‘한국어의 힌디어 번역시 나타나는 문화적·언어학적 장벽’에 대해 연구 중이다. 다른 학생들은 한국의 현대시나 소설 작품을 주제로 한 연구를 하거나 한국어 교수법에 대한 연구 등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들이 활용할 한국어 자료가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탈북 작가와 북한 작가의 작품을 비교 연구 중이라는 한 여학생은 “인도에선 해당 자료 구하기가 힘들어 직접 한국으로 찾아가 통일부 자료센터에서 두 달 가까이 살다시피 하면서 자료를 겨우 모았다”면서 “한국의 논문과 전자책 등에 좀 더 쉽게 접근할 기회가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네루대 중앙도서관에서 한국어 자료를 찾아보니 낡은 책 200여 권이 비치돼 있었다.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 자와할랄 네루대의 중앙도서관에 비치된 한국어 자료들. 한국언론진흥재단 제공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 자와할랄 네루대의 중앙도서관에 비치된 한국어 자료들. 한국언론진흥재단 제공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 자와할랄 네루대의 중앙도서관에 비치된 한국어 자료들. 한국언론진흥재단 제공

인도의 수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 자와할랄 네루대의 중앙도서관에 비치된 한국어 자료들. 한국언론진흥재단 제공

내년부터 학부 4년제로 늘리고 IT 교육 강화

인도 인문학 분야의 엘리트들이 모인 네루대에서 고급 한국어를 마스터한 이들의 졸업 후 진로는 어떨까. 아직은 "다소 막막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들을 채용할만한 한국 기업, 연구소들이 현지에 많이 진출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마즈달 학과장은 “인도는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여서, 한국을 포함한 해외 기업이 인도에 진출할 때 특별히 제2·3 언어를 요구하지 않는다”면서 “한국 기업조차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인도인’에게 큰 점수를 주기보다는, IT 등 추가적인 능력을 요구하곤 한다”고 설명했다.

네루대 한국어학과는 이 같은 현장의 요구에 발맞춰 내년부터는 IT 기술 등을 익힐 수 있는 ‘스킬 빌딩(SKILL BUILDING)’ 과정을 교육과정에 추가하고, 현재 3년제인 학사를 4년제로 개편한다.

최근 ‘교사 양성 프로젝트’도 시작했다. 인도 정부는 2020년 ‘인도의 새로운 교육 전략’을 발표하면서 중·고교의 제2 외국어 선택 과목으로 한국어를 추가한 바 있다. 사마즈달 학과장은 “교사 양성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 학생들을 중·고교 한국어 교사로 양성할 수 있게 됐다”며 “졸업생들의 취업 관문이 훨씬 넓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 자와할랄네루대의 한국어학과장실에 걸린 훈민정음. 박형수 기자

인도 뉴델리에 위치한 국립 자와할랄네루대의 한국어학과장실에 걸린 훈민정음. 박형수 기자

"한국 공부하는 印 엘리트, 한국이 적극 활용하길"

인도에선 최근 한류 광풍이 몰아치며 전역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전문가’ 집단인 네루대 교수와 학생들은 ‘인도 내 한류’ 현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사마즈달 학과장은 “한류는 한국에 대한 ‘호감의 시작’이 될 순 있는데, 아직 인도에는 ‘그 다음’이 없다”며 “거품에 그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인도인의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 호기심을 흡수하고 양국 간 활발한 교류와 발전으로 성장시킬 기회가 현저히 부족하다는 얘기다.

네루대 박사과정을 마친 한 졸업생은 “한국어 공부는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시작했지만, 실력이 쌓이면서 이 역량을 펼칠 기회가 너무 제한적이란 사실을 깨닫고 막막한 느낌이 들었다”면서 “한국 정부나 기업들이 인도에서 한국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엘리트들에 좀더 관심을 갖고 우리를 활용해 윈윈할 기회를 만들어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KPF 디플로마 인도 전문가’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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