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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운찬 칼럼

공동체의 위기, 대통령의 정치 리더십이 절실하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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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울음 우는 아이들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 한 편 구석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추(初秋)의 양광(陽光)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안톤 슈나크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첫 구절이다. 학창시절에 처음 접한 글이 올해 유난히 내 뇌리를 스친다. 한국은 양적으로 세계 10위 안팎의 경제 대국이 되었으나 저성장이 ‘새로운 일상’이 되고 사회적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은 더 벌어지고 있다. 세계인이 열광하는 K-팝과 K-컬처도 ‘굶주린 어린아이’를 달래주거나 ‘가난한 노파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 규모 커졌으나 일상은 불안
공동체 위기 타개할 비전 안보여
선거 앞두고 득표용 정책만 난무
타협과 조정 이끌 리더십이 절실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나날이 늘어나고, 국제적 상황을 둘러보아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불안감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위기에 기인한다. 가장 기본적인 가정부터 국가, 글로벌 커뮤니티에 이르기까지 작고 큰 공동체가 각기 다른 양상으로 위기를 겪고 있다.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 공동체 의식과 가치는 희박해지고 상호 긴밀했던 유대관계가 사라져 붕괴를 걱정해야 할 시점이다.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장 높은 자살률은 대한민국 공동체가 앓고 있는 고질병이다. 현재의 추세를 시급히 바로잡지 못하면 가족이 없어지고 지방이 소멸하여 언젠가는 국가마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를 엄습하고 있다. 나라 밖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계속되고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을 벌여 일론 머스크까지 제3차 세계대전을 경고하기에 이르렀다. 자본주의를 토대로 한 자유민주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이념 위에 세워진 전체주의 세력 간에 벌이는 신냉전 구조는 글로벌 커뮤니티가 해결해야 할 당면과제다.

그러나 공동체 구성원 간 이해를 조정하고 화합을 이끌어낼 리더십과 경륜, 비전을 갖춘 정치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보이지 않는다. 바람직한 정치인을 키우고 제대로 된 정치인을 골라내는 정당정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주홍글씨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정치인들이 정치무대에서 활보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나라를 극한 대결로 몰아넣으며 행정부를 서울과 세종시 두 쪽으로 갈라놓아 온갖 비효율을 겪고 있으면서도 느닷없이 김포를 서울로 편입하겠다는 발상은 성찰을 모르는 한국 정치인들의 민낯이 아닐 수 없다. 20여 년 전 노무현 후보가 대선에서 ‘세종시로 재미 좀 보았다’고 국민의힘도 내년 총선에서 김포로 재미 좀 볼 수 있을까?

가장이 무능하면 가정이 위태롭고 사장이 무능하면 회사가 불안하다. 대통령이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흔들린다. 대선 당시 얻은 득표율보다도 낮은 지지율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냉엄한 평가다. 권력의 핍박을 받으며 정치를 결심하던 그 마음, 그 자세로 돌아가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안팎으로 진흙탕 싸움을 보려고 정치판에 뛰어들었는지? 안일하게 국정을 운영하고 있지는 않은지? 과연 나는 국민과 소통을 잘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걸어온 길을 짚어보면 스스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여론에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말의 진의를 모르는 바 아니나, 주가에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경영자의 말처럼 무모하게 들린다. “국민은 무조건 옳다”는 사고는 자칫 포퓰리즘에 빠지기 쉽다.

무엇보다 먼저 ‘공정과 상식’이라는 모토를 아직 믿고 있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와 다른 행태를 요구한 표심을 정책으로 구현하여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지금 글로벌 경제전쟁의 한복판에서 장기적 경기 침체와 안보 위협이 가중되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실정이다. 여야 모두 민생을 외치지만, 대외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정치로 경제를 견인하기도 쉽지 않다. 설득과 공감을 통해 국민의 욕구를 하나로 묶고, 야당을 타협과 조정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정치 리더십으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남북전쟁을 ‘미국 혁명(American Revolution)’으로 승화한 에이브러햄 링컨은 정적을 과감하게 핵심 장관으로 기용하여 라이벌을 한 팀으로 만들었다. 담대한 비전과 통 큰 인사로 국정을 쇄신하고 대한민국 공동체를 복원해야 할 때다.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정부를 떠나는 고위 공직자의 빈자리는 대통령과 인연은 없으나 참신하고 유능한 전문가를 기용하면 새로운 정치가 싹트지 않을까?

모든 경제학자의 존경을 받은 고 윤기중 선생에 따르면, 아들인 윤석열 대통령 이름에 있는 ‘기쁠 열(悅)’은 ‘정치를 잘해 국민이 기뻐하면 다른 나라 국민도 찾아온다(近者悅遠者來)’는 공자 말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국정이 안정돼야 민생도 안정된다. 윤 대통령이 심기일전하여 낮은 자세로 ‘공정과 상식’을 구현하여 국민에게 큰 감동과 기쁨을 선사하기 바란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