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만8359명이 3억 모금…부산 피란민 보살핀 美장군의 부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1일 오전 부산 남구 평화공원에서 리처드 위트컴 장군 조형물 제막식 행사가 열리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 11일 오전 부산 남구 평화공원에서 리처드 위트컴 장군 조형물 제막식 행사가 열리고 있다. 송봉근 기자

6ㆍ25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리처드 위트컴(1894~1972) 장군 조형물 제막식이 지난 11일 오전 부산시 남구 평화공원에서 열렸다. 조형물은 위트컴 장군이 아이들과 손을 맞잡고 걸어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아이 5명은 모두 고아다.

이날 오전 11시엔 세계 각지에서 6.25 참전 용사 희생을 기리며 부산을 향해 1분간 묵념하는 ‘턴 투워드 부산’ 행사가 유엔공원에서 거행됐다. 이 자리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우리나라) 성장 바탕엔 참전용사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음을 잊지 않고 있다”고 했다. 행사에 참석한 앤드류 해리슨 유엔군 부사령관 또한 “(6ㆍ25 전쟁 때 한국에서) 목숨을 바쳐 싸운 이들,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이들을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턴 투워드 부산, 유엔 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행사가 지난 11일 오전 11시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렸다. 해외 참전용사와 내빈이 경례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턴 투워드 부산, 유엔 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행사가 지난 11일 오전 11시 부산 남구 유엔기념공원에서 열렸다. 해외 참전용사와 내빈이 경례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12일 국가보훈처와 부산시 남구 등에 따르면 위트컴 장군 조형물은 시민 성금으로 만들었다. ‘위트컴 장군 조형물 건립을 위한 시민위원회’가 지난해 11월부터 모금활동에 나선 지 8개월 만에 목표액인 3억원에 도달했다. 조형물 배경석엔 모금에 참여한 시민 등 1만8359명 이름이 적혀있다. 이 조형물은 부산시와 남구가 관리한다.

전공(戰功)보단 보살핌으로 빛난 군인  

위트컴 장군 사후 40여년 만에 제작된 조형물 속 아이들이 모두 고아인 것은 이유가 있다. 1953년 3월 파병된 위트컴 장군은 부산 주재 군수기지사령관을 맡아 ‘피란수도 부산 재건’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전투 공적보단 전국에서 부산으로 몰린 피란민을 헌신적으로 보살폈다.

리처드 위트컴 장군. 연합뉴스

리처드 위트컴 장군. 연합뉴스

당시 대한미군원조처(AFAK) 기금을 집행하는 게 위트컴 장군 임무였다. 1953년 11월 27일 중구 영주동 민가에서 불이 났다. 적정인구 30만명 수준의 도시 기반만 갖고 있던 부산엔 피란민 등 100만명 이상이 빽빽한 판자촌을 이뤄 살고 있었다. 강풍을 탄 불은 이들 판잣집을 삼킨 끝에 부산역과 부산우체국 주변으로 확산, 다음 날 오전에야 꺼졌다. ‘부산역전 대화재’로 기록된 이 불로 29명이 죽거나 다쳤고, 6000여가구가 불에 타 이재민 3만여명이 추위가 혹독한 거리로 내몰렸다.

위트컴 장군은 이들 이재민을 거둬들였고, 군수물자 등을 지원해 천막촌을 설치하는 등 구호활동을 했다. 군수물자를 민간인에게 쓴 일이 문제가 돼 의회 청문회에 불려 나가자 그는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게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게 진정한 승리”라고 답했고, 미국 정부는 오히려 더 많은 구호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1954년 위트컴 장군이 부산 애린원을 방문해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전쟁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린 장군은 1954년 퇴역 후에도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를 위해 헌신했다. 성조기 홈페이지 캡처

1954년 위트컴 장군이 부산 애린원을 방문해 아이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전쟁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린 장군은 1954년 퇴역 후에도 한국에 남아 전쟁고아를 위해 헌신했다. 성조기 홈페이지 캡처

이외에도 그는 메리놀ㆍ침례ㆍ성분도병원 등 의료시설 건립을 지원했다. 파병 장병 월급의 1%를 모금하게 하고, 기금이 부족하자 직접 한복에 갓까지 챙겨 입고 거리로 나서 모금 활동을 했다. 전쟁 난민과 고아를 위해 후생주택, 보육ㆍ요양원 등 건립을 지원했고, 건립 이후엔 예하 부대와 자매결연을 하게 해 지속해서 운영될 수 있게 도왔다.

위트컴 장군의 이런 활동은 ‘부산대 60년사’ ‘메리놀병원 50년사’ 등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는 ‘전후 황폐해진 부산의 재건을 앞당긴 인물’ '전쟁고아의 아버지' 등으로 불린다. 위트컴 장군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한국을 오갔고, 보육원을 후원하던 한국 여성 한묘숙씨와 1964년 결혼했다. 그는 1972년 한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트컴 장군은 6ㆍ25 당시 해외 참전 용사들의 묘역인 부산 남구 유엔평화공원에 잠들었다. 이 묘역에 잠든 2300여명 가운데 유일한 장성급 군인이기도 하다. 위트컴 장군에게는 지난해 11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훈장 추서를 건의한 건 박수영 국민의힘 의원(부산 남갑)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