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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혜수의 카운터어택

세상의 틈을 메운 빛나는 ‘땜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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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콘텐트제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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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원래 이름은 ‘땜빵’이었다. 수비에 구멍이 나면 메우고, 미드필드가 비면 그 자리를 채웠다. 하지만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거치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멀티플레이어. 어느 위치에 세워도 제 몫을 해내는 멀티플레이어는 감독이 바뀌어도 늘 상종가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전 축구 국가대표 유상철에 관해 2004년에 썼던 기사 일부다. 실제로 유상철은 선수 시절 최전방 공격수로도, 공격형 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중앙수비수로도 뛰었다. 그냥 뛴 정도가 아니라 모든 자리에서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다. 심지어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이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법’이라는 인터넷 유머 게시물에는 “공격수 유상철, 미드필더 유상철, 수비수 유상철 등 골키퍼를 뺀 10개 포지션에 모두 유상철을 포진시킨다”가 답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MLB 골드 글러브 유틸리티 플레이어 부문 수상자 샌디에이고 김하성. 내야 어디든 공백이 생기면 그를 찾는다. [AP=연합뉴스]

MLB 골드 글러브 유틸리티 플레이어 부문 수상자 샌디에이고 김하성. 내야 어디든 공백이 생기면 그를 찾는다. [AP=연합뉴스]

“그는 늘 엘리트 수비수였다. 유일한 질문은 그가 어디에서 플레이할 것인가다. 이미 본 것처럼, 보가츠가 오면서 그는 2루수로 밀렸다. 그러나 보가츠가 왼쪽 손목을 다치자 그가 유격수를 맡았다. 마차도가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지명타자로 전환하자 그가 3루수를 맡았다.”

팀 내 누군가가 다칠 때마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그’는 딱 ‘땜빵’이다. 지난 6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김하성이 미국 프로야구(MLB) 골드 글러브를 한국 선수 최초로 수상했을 때 MLB닷컴에 실린 기사 일부다. 샌디에이고 구단 정도면 포지션마다 백업 선수가 있다. 그런데도 감독은 보가츠나 마차도가 빠진 자리를 김하성으로 채웠다. 김하성의 골드 글러브 수상 부문 명칭이 ‘유틸리티 플레이어’다. 우리 말로는 ‘만능선수’, 즉 여러 포지션을 잘하는 선수다. 이 부문은 지난해 신설돼 올해 시상이 두 번째다.

‘땜빵’. 사전적 의미는 ‘남의 일을 대신하여 시간을 보내는 것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어원은 어떻게 될까. 비속어의 유래를 모은 책 『B끕 언어, 세상에 태클 걸다』에 “땜빵의 어원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금이 가거나 뚫어진 곳을 때우는 일을 뜻하는 ‘땜질’에서 왔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다”(219쪽)고 나온다. 과거 신문을 검색해보면, 199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등장하는 말이다. 역사가 아주 오래된 건 아니다. 멀티플레이어나 유틸리티 플레이어처럼 멋진 이름이면 좋겠지만, 땜빵이면 뭐 어떤가.

분명한 건 어원처럼 그들은 금이 가거나 뚫어진 곳을 때워 세상이 빈틈없이 돌아가게 한다. 시간이 흐른 뒤에 유상철처럼 김하성처럼 그 가치를 인정하기도 하지만, 존재감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또 금이 가거나 뚫어진 곳이 생기면 그들부터 찾는다. 여기저기 금 가고 뚫어진 우리 사회를 보며 생각했다. 멀티플레이어와 유틸리티 플레이어는, 아니 땜빵은 어디 있을까. 아니, 있기는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