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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삐라 살포는 선제공격"…김정은 '확성기 포비아' 드러냈나

중앙일보

입력

탈북단체가 2011년 2월 임진각 인근에서 대북전단을 날리는 모습. 중앙포토

탈북단체가 2011년 2월 임진각 인근에서 대북전단을 날리는 모습. 중앙포토

북한이 헌법재판소가 대북 전단 살포를 규제하고 처벌할 수 있게 한 이른바 '대북전단 금지법'을 위헌으로 결정한 것에 반발하며 군사적 위협까지 언급했다. 정보당국을 중심으로 북한이 이달 중 군사정찰위성을 발사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군사적 도발을 앞두고 명분 쌓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또 윤석열 정부가 최근 9·19 남북군사합의의 효력을 정지하려는 움직임을 의식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삐라 살포 거점·괴뢰 아성에 징벌 불소나기"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8일 "괴뢰 지역에서 '대북삐라살포금지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이 강행되고 관련 지침 폐지 절차가 본격화되고 있다"며 "종전의 대응을 초월해 놈들의 삐라 살포 거점은 물론 괴뢰 아성(牙城)에까지 징벌의 불소나기를 퍼부어야 한다는 것이 격노한 우리 혁명무력의 입장"이라고 전했다.

북한이 대북 전단법 위헌 결정을 빌미로 살포 원점은 물론 중요 시설까지 타격하겠다고 위협한 건 전단 살포를 그만큼 치명적으로 받아들인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실제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지난해 8월 윤석열 정부의 비핵화 로드맵인 '담대한 구상'을 비난하는 담화에서 대북전단에 대해 '격렬한 증오와 분격을 폭발시키는 더러운 오물'이라고 칭하며 적개심을 표출했다.

노동신문이 2020년 6월 4일자 2면 상단에 게재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담화. 김여정은 담화에서 탈북민의 대북전단 살포에 불쾌감을 표하며 남북 군사합의 파기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노동신문이 2020년 6월 4일자 2면 상단에 게재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담화. 김여정은 담화에서 탈북민의 대북전단 살포에 불쾌감을 표하며 남북 군사합의 파기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조선중앙TV 캡처, 연합뉴스

대북전단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김여정 하명법' 논란을 촉발했던 2020년 6월 6일 담화에서 김여정은 대북전단 살포를 "쓰레기들의 광대놀음"이라고 비판하면서 대북전단 살포를 주도하는 탈북민과 관련 단체를 향해 "사람값에도 들지 못하는 쓰레기", "들짐승보다 못한 인간 추출물" 등의 원색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4월부터 대북전단 다량 유입?

자유아시아방송(RFA)은 이날 북한 내 방역 컨트롤타워인 중앙비상방역지휘부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문건을 근거로 "지난 4월부터 대북전단이 북한에서 적지 않게 발견된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헌재의 지난 9월 26일 위헌 결정 이전에도 상당량의 전단이 북한 지역으로 유입됐다는 얘기다.

RFA에 따르면 해당 문건에는 "남조선괴뢰들은 악질탈북자와 반동들을 내세워 지난 4월부터 서해와 강하천 등을 통해 코로나바이러스 전파 위험성이 있는 물품들을 또다시 들여보내고 있다"며 "일부 국경 지역에서는 풍향 기구를 통해 살포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위험 적지물'이 발견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단체들이 2020년 5월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일대에서 대북전단과 소책자를 날리는 모습. 자유북한운동연합 제공, 뉴스1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단체들이 2020년 5월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일대에서 대북전단과 소책자를 날리는 모습. 자유북한운동연합 제공, 뉴스1

문건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정은 정권이 대북전단을 통한 정보유입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대북전단을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위험 적지물'이라고 지목하면서 주민들의 접촉 차단에 주력하고 있지만, 완벽하게 차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부 전단에는 북한 체제를 비하하는 내용은 물론 '최고 존엄'으로 칭하는 김정은 일가와 관련된 내용까지 담겨 있는 것도 북한 입장에선 껄끄러운 부분이다. 북한에서 금기시하는 '최고 존엄의 영상(이미지)'에 생채기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다.

대북확성기 재개 염두에 뒀나?

통신은 이날 "반공화국 삐라 살포를 비롯한 심리 모략전은 곧 '대한민국' 종말의 기폭제로 작용할 것"이라며 "삐라 살포는 교전 일방이 상대방을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벌리는 고도의 심리전이며 전쟁 개시에 앞서 진행되는 사실상의 선제공격"이라고 반발했다.

그러면서 2014년 10월 경기도 연천군 태풍전망대 인근에서 탈북자 단체가 대북전단을 날려 보냈을 당시 풍선을 향해 고사총을 발포한 것과 2020년 6월 당시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례를 언급하기도 했다. 이는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할 경우 상황에 따라 국지적인 대남 군사행동을 감행할 수 있음을 내비친 것으로 풀이된다.

북한이 대북 전단살포를 빌미로 2020년 6월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이 대북 전단살포를 빌미로 2020년 6월 개성공단 내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하는 모습.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북한의 이런 예민한 반응은 최근 윤석열 정부가 남북 간 일체의 적대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이 담긴 9·19 남북군사합의의 효력정지를 검토하고 있는 것과 연관된 측면도 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앞서 조태용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7일 대통령비서실 등을 대상으로 진행된 국회 운영위원회 국정감사에서 9·19 군사합의에 대한 대통령실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 "9·19 군사합의는 군의 방어능력과 대응능력을 심대하게 저해하는 요소들이 포함된 합의라는 점에서 문제점이 있다"고 밝히며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를 시사했다.

정부는 또 북한의 도발이 지속돼 9·19 군사합의의 효력이 정지된다면 해당 합의에 따라 금지된 대북확성기 방송을 재개할 수 있는지도 이미 검토해왔다. 윤석열 대통령도 지난 1월 4일 북한의 무인기 도발과 관련해 "북한이 다시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도발을 일으키면 9·19 군사합의의 효력 정지를 검토하라"는 지시를 직접 내렸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이 군사정찰위성 발사를 앞두고 전형적인 명분 쌓기에 나선 모습"이라며 "9·19 군사합의의 효력정지로 과거부터 극도로 경계해온 대북 방송이 재개될 가능성을 사전 차단하려는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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