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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승현의 시선

이상민 장관은 ‘월드워B’에서 승리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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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승현 기자 중앙일보 사회 디렉터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김승현 사회부디렉터

빈대(bedbug)의 공포가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다. 2024년 올림픽이 열리는 프랑스 파리는 비상이 걸렸다. 손님맞이를 앞두고 기차나 극장에서 빈대에 물리는 피해가 속출해서다. 주택 보험의 보장 항목에 빈대 피해를 넣느냐 마느냐를 놓고 찬반론까지 벌어질 정도라고 한다.

서울의 대부분 구청에도 빈대 출현 신고가 접수됐다. 속담에서나 접하던 곤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시민들도 표정이 바뀌고 있다. 팔다리에 수십 군데가 붉게 부어오른 빈대 물린 사진에 머리끝이 쭈뼛해진다. 지하철이나 극장의 섬유 재질 의자에 엉덩이를 대고 싶지 않다. 진짜 전쟁의 와중에 죄송한 비유이지만, ‘빈대와의 전쟁’은 불가피해지고 있다.

좀비영화처럼 공포스러운 빈대
살충제 내성 놓친 정부는 불안
“만반의 준비”로 시민 지켜내야

만만해 보인 전쟁에서 인간은 수세에 몰리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보다 공포는 덜하지만, 불안과 불신은 비슷한 수준이다. 환경 담당 후배가 쓴 최근의 기사는 슬픈 예감이 틀리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을 준다. 정부가 빈대를 막기 위한 살충제 가이드라인을 내놨는데, 국내에서 발견된 빈대가 이미 내성을 가진 살충제라는 내용이다.

사정은 이랬다. 질병관리청은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으로부터 전달받은 살충제(퍼메트린과 델타메트린)를 빈대 대응 안내문에 포함해 각 부처에 전달했다. 문제는 피레스로이드계 살충제인 두 ‘무기’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었다는 점이다. 지난 4월 서울대는 “2021년 국내에서 발견된 ‘열대 빈대’는 피레스로이드 살충제에 저항성을 갖고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진은 “살충제 원액에 빈대를 담갔다 빼도 죽지 않는 수준”이라고도 했다.

어쩌다 살충제가 아닌 ‘생충제’가 우리의 무기가 됐을까. 국립환경과학원 측은 “기존에 식약처가 허가한 빈대 살충제 목록에 따라 안내했다”고 해명했고, 환경부 측은 “허가된 것 외에 다른 살충제를 제시하는 것은 법에 어긋난다”며 신중한 입장이다.

갑작스러운 빈대의 침공에 당황한 소관 부처의 처지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한두 번 본 모습이 아니어서 걱정이 크다. 8년 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MERS) 파동 때의 ‘낙타 사건’을 기억하는가. 당시 보건복지부는 ‘낙타와의 밀접한 접촉을 피하세요’ 등의 안내를 했다가 조롱의 대상이 됐다. 낙타가 메르스 주요 감염원이라는 전제에, 중동지역 여행 시 주의사항을 연결지은 ‘순수 삼단논법’을 그대로 전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정부의 발 빠른 조치 덕분에 서울 도로에 낙타가 한 마리도 없다”는 해학으로 씁쓸함을 달랬다. 지난 8월엔 새만금 넓은 땅에 천막만 치면 야영이 가능하다는 판단 ‘덕분에’ 세계에서 온 4만 청소년이 화상벌레에 물리고 열사병에 걸렸다. 지금은 “빈대가 나타났다”는 시민의 신고에 “관련 지침이 없다”는 지자체의 답변이 반복되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지난 3일부터 ‘빈대 정부합동대책본부’를 구성·운영한다고 하니 일단 기대를 걸어본다. 이 본부엔 행안부와 보건복지부, 질병관리청, 문화체육관광부, 고용노동부, 교육부, 국토교통부, 법무부, 국방부, 환경부 등 10개 관계 부처와 지자체가 참여한다. 이상민 행안부 장관은 “빈대의 특성과 방제 방법 등을 정확히 안내하고 범정부 차원에서 빈대 방제와 확산 방지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빈대 창궐이 아포칼립스는 아니지만, 좀비 영화 ‘월드워Z(zombie)’보다 더 비장하게 임했으면 한다. 전문가의 무능이 탄로 나는 장면을 현실에선 보고 싶지 않아서다. 영화 전반부에 구원자처럼 등장한 하버드대의 백신 전문가는 조사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좀비에 놀라 총기 오발로 숨졌다. 치아가 없으면 물려도 좀비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북한이 2300만명 주민의 이를 다 뽑아버렸다는 얘기도 영화에 등장한다. 우리 현실에서 이와 유사한 황당한 대책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상대적으로 빈대에 익숙한 유럽 선진국이 속수무책이라면, 한국에는 더 도전적인 상황이 될 수 있다. 과거보다 여행자는 늘었고, 온난화로 인해 벌레의 습격이 빈발하고 있다. 새로운 살충제가 인체와 자연에 어떤 악영향을 미칠지도 따져봐야 한다. 부정적인 ‘전황’이 예고되는 상황에서 정부의 전투력이 부족하면 빈대 잡으려다 시민들 가슴만 태우는 결과로 이어질지 모른다.

경험하지 못한 전쟁, ‘월드워B (bedbug)’를 선포한 이상민 장관과 대책본부의 선전을 기원하며, 월드워Z에서 가족을 지키고 반격의 실마리를 찾은 주인공 제리(브래드 피트 분)의 마지막 독백을 전한다.

“만반의 준비를 해라. 전쟁은 이제 시작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