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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쓰는 무기" 암묵적 약속 금 갔다…"핵무력 최강" 반기는 北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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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전술핵 사용을 위협한 데 이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서도 이스라엘 극우파를 중심으로 핵 사용을 시사하는 발언이 처음으로 나왔다. "핵은 어차피 쓰지 못하는 무기"라는 2차 세계 대전 후 국제사회의 암묵적 공감대에 금이 가는 상황으로 북한에 잘못된 교훈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2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파괴된 가자 지구에 있는 난민 캠프 건물. AFP=연합뉴스.

지난 2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파괴된 가자 지구에 있는 난민 캠프 건물. AFP=연합뉴스.

가자에 '핵 사용' 시사

아미차이 엘리야후 이스라엘 예루살렘 및 유산 담당 장관은 5일(현지시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가자지구에는 지금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며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핵 공격도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반(反) 아랍 극우 성향 정당 소속이다.

논란이 일파만파 퍼지자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성명을 통해 "엘리야후 장관의 발언은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가자지구 지상전에서) 무고한 이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국제법을 지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서다.

이스라엘은 핵 보유 여부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NCND'(neither confirm nor deny) 입장을 꾸준히 지키고 있지만, 1950~1960년대 비밀리에 핵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한 뒤 사실상 핵 보유국으로 간주된다. 하마스를 겨냥한 이스라엘의 핵 위협이 아직까지는 극우파 각료의 돌발성 발언에 그치는 분위기지만, 전황에 따라 중동에도 핵 위협의 그림자가 드리울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 AFP.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 AFP.

김정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극우 정당 소속 장관이 국내정치적 이유로 다소 급진적인 주장을 펼쳤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전술핵 사용을 시사하는 발언 하나하나가 모이게 되면 자칫 이스라엘의 전황이 불리해졌을 때 '자기 실현적 예언'의 형태로 위기를 고조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전술핵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 인지되기 시작하면 그 파장은 전 지구적 차원으로 퍼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핵 위협 고조

실제 유럽과 중동에서 두 개의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국제사회 비확산 논의의 동력이 최근 크게 떨어진 게 사실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2일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비준을 철회하는 법안에 최종 서명했다. '모든 곳에서 모든 주체에 의한 핵폭발 실험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다자 간 조약인 CTBT에서 러시아가 23년만에 발을 빼면서 조만간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공포심을 조장할 목적으로 핵실험에 나설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그간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벨라루스에 전술 핵무기를 배치하고 일부러 '핵 가방'을 든 군인을 언론에 노출시키는 등 공공연히 핵 사용을 위협했다. 로이터 통신은 지난 3일 "러시아 안보 전문가와 국회의원 사이에서 서방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핵폭탄 실험을 해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다"며 "현실화할 경우 강대국이 핵 실험에 나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달 13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열린 독립국가연합(CIS) 정상회의에서 연설하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13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에서 열린 독립국가연합(CIS) 정상회의에서 연설하는 모습. 연합뉴스.

잘못된 교훈 얻는 北

이처럼 세계 각지에서 핵 사용의 문턱이 속속 낮아지자 북한은 대놓고 핵 무력을 과시하고 있다. 핵무기를 김정은 체제를 지키는 '보검'으로 여기는 북한은 지난해 핵 무력 정책법을 제정해 선제 핵 타격의 길도 열어뒀다. '여차하면 핵을 쓸 수 있다'는 북한식 레토릭이 엄포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북한이 현 국제 정세를 십분 활용할 거란 우려도 나온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6일 "국가 핵 무력이 속속 급상승해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강세에 확고히 도달했다"고 보도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가 자꾸만 훼손되는 현상을 자신들의 핵 보유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로 활용하려 한다"며 "각국이 자위권 차원에서 핵을 보유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여론이 일파만파 퍼지면 사실상의 핵 보유국으로 인정받기도 더욱 유리해질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9월 북한이 첫 전술핵공격잠수함 김군옥 영웅함을 진수했다며 공개한 사진. 진수식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지난 9월 북한이 첫 전술핵공격잠수함 김군옥 영웅함을 진수했다며 공개한 사진. 진수식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조선중앙통신. 연합뉴스.

실제 북한은 지난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화성-17형'의 시험발사에 성공했다고 주장한 11월 18일을 최근 '미사일공업절'로 제정했다. 조만간 10월 중 재발사를 공언했다 미뤄진 군사정찰위성 발사 등 중대 도발에 나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영호 통일부 장관은 6일 취임 100일을 기념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기술 지원을 받는 정황이 있고, 이러한 상황이 발사가 지연되는 이유 중 하나"라면서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기술 지원을 받고 보완이 이뤄졌다고 판단되면 발사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북핵 문제 대입해 정세 판단

한편 정부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 격화하는 국제 정세를 북핵 문제와도 연계해 판단하고 있다. 일례로 정부는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유엔 총회에서 실시된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에서 기권했는데, 하마스에 대한 규탄이 결의안에서 빠져선 안 된다는 이유였다. 이번 전쟁은 지난달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에 대한 기습 공격으로 시작됐다.

이 같은 판단은 한국이 그간 국제사회에서 "한반도 문제의 근본 원인은 북한의 불법적인 핵·미사일 개발"이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해온 것과도 무관치 않다. 한·미 연합훈련과 대북 제재의 원인이 어디까지나 북한에 있듯, 국제사회의 모든 사안에서 갈등의 근본 원인에 대한 규탄 없이 논의가 '양비론'으로 흐를 경우 찬동하기 힘들다는 설명이다. 앞서 황준국 주유엔대사는 지난 3월 국내 기자 간담회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최근 유엔에서 북핵 문제에 있어 미국의 책임도 있다는 '양비론'을 펼치고 있는데 사실관계에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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