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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된 서울 거리, 뉴욕 같은 예술 도시 꿈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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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3호 18면

[비욘드 스테이지] 이창기 서울문화재단 대표  

‘아트페스티벌 서울’을 기획한 이창기 서울문화재단 대표. 최영재 기자

‘아트페스티벌 서울’을 기획한 이창기 서울문화재단 대표. 최영재 기자

지난달 14일 한강 노들섬에선 공연계 새 역사가 쓰였다. 국내 최초로 야외 전막 발레 ‘백조의 호수’가 공연된 것이다. 지난해 오페라로 시작했던 ‘노들섬클래식’ 축제를 올해는 습기와 소음에 민감한 발레까지 확장한 것. 한강 한복판에서 펼쳐진 백조들의 군무가 마치 진짜 철새 도래지에 날아든 새 무리처럼 실감나는 새로운 감흥이었다.

이 무대를 기획한 서울문화재단 이창기 대표는 이날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짜릿함을 맛봤다”고 했다. 오전 내내 결코 그치지 않을 것 같던 비가 정오를 지나며 거짓말처럼 그친 것이다. “야외 공연을 많이 해봐서 촉이 있는데, 그날은 꼭 될 것 같았어요. 오후 3시에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했지만 빗속에서 모든 준비를 다 하고 있었는데, 말끔하게 개는 순간 정말 짜릿했죠. 잘 안하던 SNS에 사진까지 찍어 올릴 정도로요.(웃음) 야외 공연이 리스크가 있지만, 그런 가운데 집중하는 묘미가 있어요. 아티스트의 예술혼 뿐 아니라 모인 사람들의 온기와 생활소음, 야경까지 어우러지는 게 또 다른 관전포인트인 거죠. 내년부터 재단이 노들섬 운영을 맡게 됐으니, 더 많은 콘텐트로 채워진 예술섬을 만들 겁니다.”

지난달 노들섬에서 공연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사진 서울문화재단]

지난달 노들섬에서 공연된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사진 서울문화재단]

축제의 계절은 가을이라지만, 올해 서울은 내내 축제판이다. 서울문화재단은 ‘아트페스티벌 서울’이라는 사계절 축제 브랜드를 내걸었다. 봄에는 서커스페스티벌, 여름에는 비보이페스티벌, 가을에는 거리예술축제와 생활예술페스티벌, 한강노들섬클래식페스티벌을 열었고, 겨울에 열릴 융합예술페스티벌까지 총 7개의 축제가 돌아간다. 서울이 1년 내내 문화예술 콘텐트로 북적이니 창작자들은 바빠졌다. 시민들은 일부러 공연장이나 미술관을 찾아가지 않아도 공원이나 광장에서 무심코 문화예술에 빠져들곤 한다.

“코로나 기간 쌓인 문화적 욕구도 높지만, 그간 위축된 예술가에게도 많은 무대를 제공해야 겠다는 생각에 축제를 확대했어요. 예술가가 무대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그걸로 좋은 작품을 개발하는 선순환이 되게 하려면 판부터 벌려야 하니까요. 전에 다른 기관에 있을 때 거리에서 무용 공연을 열었는데, 관람률이 가장 낮은 무용을 대중이 쉽게 접근하게 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많은 무용가들에게 무대를 만들어주게 되더군요. 야외 공연이 험난하지만, 결국 흥행과 무관한 기초예술분야를 지원하는 게 공공기관의 역할이니까요. 기초가 탄탄해야 성숙한 융합예술도 만들 수 있겠죠.”

노들섬에서 공연된 발레 ‘백조의 호수’. [사진 서울문화재단]

노들섬에서 공연된 발레 ‘백조의 호수’. [사진 서울문화재단]

서울문화재단은 예술인 지원사업과 시민의 문화향유를 위한 각종 사업을 주관하는 서울시 출연기관이다. 매년 200억 규모의 예술지원금을 통해 1400건 이상의 창작활동이 일어나고, 축제만으로도 시민 30만여 명의 문화예술 참여를 유발하고 있다. 하지만 18개 거점에 사업이 분산되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그간 존재감이 약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2년 전 이창기 대표 취임 이래 서울문화재단은 무려 22개 신규사업을 론칭하며 이목을 끌었다. 대한민국예술문화대상, 삼일투명경영대상 수상 등 상복도 터졌다. 이 대표가 대대적인 조직개편과 지원사업 개편을 단행해 시너지를 냈다는 평가다. 특히 예술인 NFT, 서울예술상 등 예술가를 리스펙트하는 신규사업들이 현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달 서울문화재단은 서울예술인지원센터를 개관했다. [사진 서울문화재단]

지난달 서울문화재단은 서울예술인지원센터를 개관했다. [사진 서울문화재단]

“예술가들 자존감을 세워줄 필요도 있거든요. NFT는 예술인생을 담은 짧은 기록이지만 후대에까지 남길 수 있는 ‘대체불가’한 것이잖아요. 나의 예술적 브랜드를 디지털자산화 시켜서 영원히 남긴다는 것에 대해 감동하더군요. 서울예술상은 좋은 작품을 레퍼토리화하고 브랜드이미지도 높여주기 위한 거예요. 몇천만원 지원해 놓고 결과를 안 챙기니 좋은 작품도 흐지부지 되잖아요. 다른 상들은 주로 예술가를 보고 시상하지만, 우린 작품에 주는 게 특징이라 신인들도 많이 수상했어요. 이번 2회째는 포르셰 등 기업들도 참여 의사를 밝혀와 기업 메세나로도 연결되고 있죠.”

서울거리예술축제 모습. [시진 서울문화재단]

서울거리예술축제 모습. [시진 서울문화재단]

특히 그는 서울시 지원사업에서 소외되어 왔던 청년과 원로까지 적극 끌어들인 ‘그물망 지원체계’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최근 중앙정부의 지원체계에 대대적인 개편이 예고되면서 예술가 지원사업의 방향성과 철학 자체가 화두로 떠올랐다. 이 대표는 “선순환”에 방점을 찍었다. “지원사업은 양날의 검이라 정답은 없어요.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궁극적 가치를 생각해야죠. 지원금으로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열정이 아니라 지원금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정부도 경계하는 것 같아요. 활동을 해도 수익 발생이 안 되니 지원금만 바라보는데, 그러다 보면 예술적 노력보다 지원에만 매몰되는 악순환에 빠지거든요. 선순환이 시작되려면 공공기관에서는 참여기반을 다양하게 마련해야 해요. 지원금이 아니라 무대를 열어주는 거죠. 우리가 기존의 창작공간 11곳을 무대로 개방하는 ‘서울스테이지11’ 프로그램을 만든 것이나, 예술교육센터를 3개소나 늘린 것도 예술가들을 활동하게 하려는 겁니다. 제가 일을 많이 벌인 것 같지만, 그런 선순환 체계를 위해 기존 사업을 재정비했을 뿐이에요.”

이창기 대표는 예술 생태계 전문가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다 문화예술계에 뒤늦게 입문했지만, 국내 최대 규모의 문화예술기관인 세종문화회관에서 오랜 기간 현장을 발로 뛰고, 수많은 예술인과 부대끼며  ‘예술계 핵인싸’가 됐다. 강동문화재단·마포문화재단 등 기초문화재단을 경영하며 향유자의 니즈에도 빠삭해졌다.

“무용을 하셨던 어머니 영향으로 제가 춤을 좀 춥니다.(웃음) 어려서 피아노도 치고 파이프오르간까지 배웠죠. 나름 예술적 환경에서 자랐는데, 업계는  냉혹한 경쟁사회더군요. 초기엔 냉대와 무시도 당했지만 결국 일로 만회했어요. 예술인들을 만나기 위해 매일 대학로나 각종 공연장 주변 술집에서 밤을 지새웠죠.(웃음) 그땐 직접 만나지 않으면 모르던 시절이니까요. 세종문화회관의 세 축인 공연기획과 경영기획, 홍보를 다 거치면서 공연 생태계를 구석구석 알게 됐죠. 비유하자면 기계 부속품까지 다 꿰고 있는 공장장이랄까요.”

서울생활예술페스티벌 메인 공연 중 하나였던 동행오케스트라의 연주. [사진 서울문화재단]

서울생활예술페스티벌 메인 공연 중 하나였던 동행오케스트라의 연주. [사진 서울문화재단]

서울문화재단은 내년 20주년을 맞는다. 성인식을 어떻게 치를지 궁금한데, 그는 거창한 행사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20주년을 터닝포인트 삼아 예술하기 좋은 도시 만들기에 매진하겠다”면서 지난달 개관한 예술인지원센터와 내년 강북·서초·은평에 새로 개관할 문화예술교육센터 자랑을 늘어놨다. “뉴욕이 모든 예술의 집약체가 된 건 예술가들이 활동하기 좋은 여건이 조성돼 있기 때문이거든요. 서울도 그런 도시 브랜드를 키우기 위한 환경을 만드는 데 재단이 앞장서려 해요. 예술인에게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혜택을 주는 예술인지원센터와 예술가들이 강연도 하고 공연도 하는 교육센터를 잘 정착시키려 합니다. 잠깐 흥행하는 이벤트보다 공공 역할을 잘 하는 게 문화예술을 살리는 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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