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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주 남긴 '100억 선물'…뇌출혈 딸 둔 엄마, 10년 만에 쉰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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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잠 자면서 좀 쉬었어요. 단비 같은 시간이었어요.”

태어날 때 뇌출혈 4기 진단을 받은 10살 딸 시연(가명)이를 키우는 이모(46)씨는 최근 시연이와 생애 처음으로 짧은 이별을 했다. 서울대병원의 중증 소아 환자 단기돌봄시설인 ‘넥슨어린이통합테어센터’에 아이를 맡기면서다. 이 시설은 지난해 별세한 김정주 넥슨 창업주의 통 큰 100억원 기부(보건복지부 25억원 지원)가 바탕이 돼 지어졌다. 인공호흡기 등 의료 기계에 의존하는 중증 소아·청소년을 가족 대신해 돌봐주는 국내 첫 독립형 어린이 단기돌봄의료시설이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대병원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별칭:도토리하우스) 병실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대병원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별칭:도토리하우스) 병실의 모습. 연합뉴스

시연이는 조산으로 일찍 태어나면서 뇌 손상을 받았다. 누워 지내는 와상환자로 배에 뚫린 구멍(위루관)으로 식사한다. 곁에 늘 엄마나 아빠가 24시간 붙어있다. 그런데 이번에 센터에 맡기면서 엄마 이씨는 2박3일간 간병 부담을 잠시나마 덜 수 있었다. 이씨는 “아이가 아파서 입원했을 때 빼고 처음 떨어져 봤다”라며 “걱정도, 긴장도 많이 됐는데 서울대병원에서 하는 거라 믿고 맡겼다. 의료진이 보내준 사진을 보니 아이가 너무 밝은 미소를 짓고 있어 안심했다”고 했다. 시연이 위로 쌍둥이 언니와 12살 언니가 더 있다. 이씨는 “그간 아이를 어디 맡기기 어려워 온전히 아빠랑 육아를 전담해야 했다”라며 “많이 지쳤었는데 막내 없이 발 뻗고 쉰 게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다음 달에 3박을 추가로 예약해놨는데 5박으로 늘리고 시연이 위의 언니 2명을 데리고 첫 여행을 떠나볼 생각이다.

이 시설은 서울대병원 인근에 연면적 997㎡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로 지어졌다. 총 16개 병상이 2·4인실로 나뉘어 있다. 1일 문을 열었고 이틀 전인 지난달 30일부터 환자가 입원하기 시작해 누적 10명(2명 퇴원)이 이용하고 있다. 만 24세 이하 소아·청소년이면서 ▶자발적 이동이 어렵고 ▶인공호흡기‧산소흡입 등 의료적 요구가 필요하며 ▶폐렴 등 급성기 질환이 없는 안정적인 상태 등의 3가지 기준을 만족하면 사전 진료 뒤 들어갈 수 있다. 현재 95명이 외래를 봤고 이 중 80명가량이 내달 초까지 예약을 완료했다. 입원은 한 번에 최대 7박까지 가능(연간 총 20박)하며 환자는 비용의 5%만 부담하면 된다. 병원에 따르면 7박 기준 10만원 정도(의료 소모품 비용 제외)라고 한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대병원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별칭:도토리하우스) 내부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울대병원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별칭:도토리하우스) 내부의 모습. 연합뉴스

인공호흡기 등 기계에 의존해 24시간 간병 돌봄이 필요한 중증 소아 청소년은 전국 약 4000명으로 추산된다. 성인은 24시간 케어가 필요한 중증 환자가 되면 요양병원이 대신할 수 있지만, 아이를 둔 가족은 의지할 곳이 없다. 호흡이 유지되지 않아 산소를 투여하거나 빈번하게 가래를 뽑아야 하고 튜브로 영양을 공급(경관영양)해야 하는데 이런 행위가 의료법상 의료인만 할 수 있게 돼 있어 간병인을 구할 수 없고 부모가 온전히 떠안는다.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중증 아이를 둔 보호자의 하루 간병 시간은 평균 14.4시간이다. 태어날 때부터 저산소성 뇌병변을 앓은 민수(가명·5) 엄마는 “밤에도 많이 케어해야 해 에너지 음료로 버틴다”라며 “개인의 삶은 감히 생각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민수 엄마는 이번에 아이를 센터에 맡기고 놀이동산에 한 번도 못 가본 큰 애와 제대로 된 첫 나들이를 해볼 참이다.

병원은 이 시설을 위해 진료 교수를 5명 채용했다. 김민선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가 선후배에게 일일이 e메일을 보내 시설 취지를 설명한 뒤 자원을 받았다고 한다. 중증 어린이를 돌볼 수 있는 간호 인력도 20명 뽑아 3교대로 운영한다. 김영태 서울대병원장은 “의료 돌봄 시설 부재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중증 소아청소년 환자와 가족이 휴식과 재충전의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서울대병원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 개소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김영태 서울대병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서울대병원

지난달 30일 서울대병원 넥슨어린이통합케어센터 개소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김영태 서울대병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서울대병원

최은화 서울대어린이병원장은 “일반 병동과 똑같은 수준의 시설을 갖춘 진료 환경과 의료장비를 갖췄다”라며 “최상의 치료를 제공하기 위해 24시간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상주하며, 아이들만을 대상으로 한 보호자 없는 간호간병통합 서비스를 처음 제공하는 의료시설”이라고 설명했다. 혹시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서울대어린이병원 중환자실로 즉시 이동해 대처할 수 있도록 전용 구급차도 갖췄다. 아이들이 머무는 동안 사회복지사가 자원봉사자, 음악치료사 등과 함께 놀이 치료 등도 제공한다.

김민선 교수는 “해외에서는 지속적인 간병이 필요한 아이들의 부모가 돌봄 부담에서 벗어나 일시적인 휴식과 회복의 기회를 갖도록 가정을 방문하거나 단기간 기관에 위탁하는 ‘리스파이트 케어(Respite Care)’를 제공하고 있다”며 “국내에서도 이런 모델이 다른 지역에도 확산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센터의 별칭은 도토리하우스다. 김민선 교수는 “작은 도토리 같은 아이들이 커다란 참나무로 자랄 때까지 안전하고 편안하게 보살피는 집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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