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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2인자’ 리커창 40년 뒷바라지… 청훙의 ‘그림자 내조’도 끝나다

중앙일보

입력

2014년 아프리카 순방 당시 리커창(李克強) 중국 국무원 총리(왼쪽)와 부인 청훙(程虹) 여사. 만유독자망

2014년 아프리카 순방 당시 리커창(李克強) 중국 국무원 총리(왼쪽)와 부인 청훙(程虹) 여사. 만유독자망

평생 뒷바라지한 남편이 하루아침에 비명횡사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황망하고 슬픈 사람은 누굴까? 가족, 그중에서도 일생을 동고동락한 부인이 아닐까 싶다. 지난주 급성 심장질환으로 사망한 리커창(李克強‧68) 전 중국 국무원 총리와 그 부인 청훙(程虹‧66)의 이야기다. 리커창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중국 당국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의심과 추측을 낳고 있다. ‘비운의 2인자’ 남편을 40년 넘게 지켜본 부인의 지금 심정은 오죽할까. 리 전 총리에 대한 회고와 평가가 쏟아지는 현시점, 묵묵히 남편 리커창 곁을 지켜온 청훙 여사의 이야기와 총리 부부의 일화를 소개한다.

중국 잡지 ‘박객천하(博客天下)’의 표지를 장식한 청훙(程虹). 바이두 캡처

중국 잡지 ‘박객천하(博客天下)’의 표지를 장식한 청훙(程虹). 바이두 캡처

청훙은 총리 부인이기 전에 베이징(北京) 수도경제무역대학(首都經濟貿易大學) 영문학과 교수였다. 온화하고 겸손한 성품과 뛰어난 영어 실력을 겸비해 리커창의 ‘소프트 파워’로 불렸다. 중국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원로 출신 아버지를 둔 홍이대(紅二代)에 지성과 미모를 다 갖췄지만, 공식 행사 외에는 늘 수수한 차림이었다. 수행원들에겐 친근한 ‘청 교수님’으로 통했다.

2014년 아프리카 순방 중 에티오피아에 도착한 리커창(李克強) 중국 국무원 총리(왼쪽)와 부인 청훙(程虹) 여사가 손을 흔들고 있다. 중국정부망

2014년 아프리카 순방 중 에티오피아에 도착한 리커창(李克強) 중국 국무원 총리(왼쪽)와 부인 청훙(程虹) 여사가 손을 흔들고 있다. 중국정부망

청훙은 남편 리커창의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열성을 쏟았다. 리커창이 ‘중난하이(中南海)’에 입성해 2인자로 거듭나기까지 청훙의 내조 없이는 불가능했을 거라는 게 세간의 평가다. 리커창은 1998년 허난(河南)성 최연소 성장과 2004년 랴오닝(遼寧)성 당 서기를 거쳐 2007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베이징에 돌아왔다. 이 시기 청훙은 리커창과 10년 넘게 떨어져 살며 일과 육아를 병행했다. 기차로 하루 7~8시간 걸리는 거리를 오가며 남편을 챙겼고, 암 투병 중이던 시어머니 병수발도 5년 넘게 들었다.

‘현모양처’ 청훙은 학자로서 학술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청훙의 저명한 번역 작품은 대부분 달리는 기차 안에서 탄생했다. 별거하는 10년 동안 틈틈이 기차에서 번역한 글을 모아 낸 책이 바로 『미국 자연주의 문학전집(美國自然文學經典譯從)』이다. 이 책은 2012년 8월 출간됐는데, 같은 해 11월 리커창은 정계 서열 2위 자리에 올랐다. 그 덕분에 청훙의 책도 한 때 베이징 서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진열됐었다는 후문이다.

리커창(李克強) 전 중국 국무원 총리의 부인인 청훙(程虹) 여사가 10년에 걸쳐 번역한 책 ‘미국 자연주의 문학전집(美國自然文學經典譯從)’. 바이두 캡처

리커창(李克強) 전 중국 국무원 총리의 부인인 청훙(程虹) 여사가 10년에 걸쳐 번역한 책 ‘미국 자연주의 문학전집(美國自然文學經典譯從)’. 바이두 캡처

리커창이 총리로 재직한 10년 동안 청훙은 공개 행보가 많진 않았지만, 몇 차례 해외 순방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청훙은 2014년 처음 국제 외교무대에 등장했는데, 통역 없이 대부분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영어가 유창해 주목받았다. 같은 해 에티오피아 물라투 테쇼메 대통령 내외와 영국 캐머런 총리 부인에게 자기 번역서를 선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때 캐머런 총리 내외는 인기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의 출연진 사인이 담긴 시나리오와 찰스 디킨스 작품집 DVD로 화답했다. 베이징대 재학 시절부터 영어 법률 서적 원서를 번역할 정도로 뛰어난 리커창의 영어 수준과 청훙의 문학적 취향을 다분히 고려한 선물이란 평가가 전해진다.

2014년 6월 16일(현지시간) 영국을 방문한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가운데)와 부인 청훙(오른쪽)을 영국 정부 고위 관리들이 공항에서 영접하고 있다. 신화망

2014년 6월 16일(현지시간) 영국을 방문한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가운데)와 부인 청훙(오른쪽)을 영국 정부 고위 관리들이 공항에서 영접하고 있다. 신화망

리커창이 승승장구할수록 청훙은 처신에 더욱 신중을 기했다. 청훙은 수도경제무역대에서 두 번이나 ‘최우수 교수 10위’에 선정될 정도로 강의에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리커창이 ‘중난하이’에 입성한 이후론 더 이상 강단에 서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해 왔다. 혹여나 구설에 휘말려 총리 남편에게 누를 끼칠까 사교모임과 연회도 멀리했다고 한다. 학교 측의 임원직 제안도 모두 고사하고, 여전히 학술위원회 위원으로서의 연구 활동만 하고 있다.

2014년 아프리카 순방 중 에티오피아 현지 대학을 방문한 리커창(李克強) 중국 국무원 총리의 부인 청훙(程虹) 여사. 중국정부망

2014년 아프리카 순방 중 에티오피아 현지 대학을 방문한 리커창(李克強) 중국 국무원 총리의 부인 청훙(程虹) 여사. 중국정부망

청훙의 번역서와 관련해 일화가 하나 더 있다. 1986년 청훙은 영국 정치 풍자 TV 시트콤 ‘예스 미니스터(Yes Minister)’의 책 버전을 중국어로 번역했다. 하지만 당시 출간을 원하는 출판사가 마땅히 없었다. 그러자 리커창은 자전거를 타고 중국문연출판사(中國文聯出版社)를 찾아가 아내의 번역 원고를 출판해 줄 수 있냐고 직접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다른 번역본 『신관장현형기(新官場現形記)』가 이미 시중에 나온 터라 청훙의 번역서 『준명대신(遵命大臣)』은 1991년에야 빛을 볼 수 있었다. 리커창은 『신관장현형기』의 책 제목이 잘못 번역됐다고 지적했는데, 역시나 이 책은 대중에게 금방 외면당했고. 뒤늦게 나온 청훙의 책이 오히려 대표 번역서가 됐다.

2014년 아프리카 순방 중 에티오피아 공항에 도착한 리커창(李克強) 중국 국무원 총리와 부인 청훙(程虹) 여사. 중국정부망

2014년 아프리카 순방 중 에티오피아 공항에 도착한 리커창(李克強) 중국 국무원 총리와 부인 청훙(程虹) 여사. 중국정부망

1983년에 결혼한 리커창과 청훙은 올해로 결혼 40주년을 맞았다. 슬하에 딸 1명과 외손주 1남 1녀를 두고 있다. 지난달 27일 리커창이 세상을 떠나면서 40년 넘게 이어진 청훙의 ‘그림자 내조’도 끝이 났다. 검소하지만 지성과 기품이 넘쳤던 총리 부부의 모습은 이제 역사책 속에만 남겨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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