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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태준의 마음 읽기

아침 이슬에 담긴 우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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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태준 시인

문태준 시인

가을이 깊어간다. 틈이 날 때마다 가을을 바라본다. 햇살 아래에 있는 하얀 억새를 바라본다. 사진에 담듯이, 그러나 육안으로,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작은 잎이 붉게 물든 담쟁이를 바라본다. 단단한 벽을 타고 올라가다 뻗어가길 멈춘 담쟁이를 걸음을 멈추고 바라본다. 덩굴을 걷는 사람을 바라본다. 덩굴은 꽤 말랐다. 나뭇가지에서, 밭담에서, 텃밭에서 마른 덩굴을 잡아 당겨가며 덩굴을 걷고 있는 사람을 바라본다.

거기에 가을이 있고, 거기에 마음을 얹어본다. 풍경을 관조한다. 풍경 속에는 일어나는 것도 있고, 잠잠해지는 것도 있다. 가을빛의 미세한 이동을 바라보기도 한다. 가을빛 속에 마음을 넌지시 내려놓기도 한다. 그러면 소음이 잦아들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가을 풍경 속에 내려놓은 마음
‘자아의 소멸’을 경험하는 관조
제주 귤빛에서도 세상사 잊어

마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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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일본 시인 야마오 산세이의 시편을 읽었다. 그는 시 ‘고요함에 대해’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요함이다/ 산에 둘러싸인 작은 밭에서/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게 괭이질을 하다가/ 때로 그 허리를/ 짙푸른 산을 향해 쭉 편다/ 산 위에는/ 작은 구름이 몇 덩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다/ (……) / 산은 고요하다/ 구름은 고요하다/ 땅은 고요하다/ 벌이가 되지 않는 것은 괴롭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또 필요한 것은/ 고요함이다.’

설령 큰 벌이는 되지 못하더라도 고요함을 지니면서 사는 일에 시인은 의미를 둔다. 천천히 흘러가는 작은 구름을 보듯이, 짙푸른 산을 보듯이 그렇게 관조할 때 우리도 고요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관조의 계절은 단연 지금 이 가을의 시간일 것이다.

제주에는 ‘물방울의 화가’로 알려진 김창열(사진) 화백의 미술관이 있다. 김창열 화백이 자신의 대표작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해 세워졌다. 나는 얼마 전 미술관을 찾았다. 기획전 ‘관조의 물방울’을 개최하고 있었다. 기획전을 열면서 미술관에서는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보내기 위한 것이다. 김창열미술관도 하나의 물방울이 되어 인위를 자연으로 돌려보낸다”라면서 “김창열의 물방울을 관조적인 시선으로 살펴본다면 단순한 물방울 그 자체로의 형태가 아닌 그 안에 각양각색 다양한 표정을 발견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나는 김창열 화백이 그린 최초의 물방울 그림인 ‘밤에 일어난 일’ 앞에 오래 머무르며 작품을 바라보았다. 검은 바탕의 화폭에 물방울 하나를 그린 그림이었다. 김창열 화백은 이 그림에 대해 어느 날 그림 위에 물방울이 맺힌 것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그것에서 회화의 모든 답을 찾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나는 검은 밤과 대비되는 투명한 하나의 결정체로서의 물방울을 바라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이 그림의 탄생을 이끈 것은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관조일 것이었다. 게다가 하나의 물방울 속에 온 세계가 투영된 것을 관조하다 보니 나라는 생각과 나라는 고집이 조금은 누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평온도 마음에 잠시 깃들었다. 그것은 아마도 김창열 화백이 지향했던 ‘에고의 소멸’이 아닐까 싶었다.

이 가을에 내가 더 특별하게 감각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귤의 빛깔이다. 노지의 감귤은 수확의 시기를 맞았다. 귤을 따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고, 귤나무에서 딴 귤을 상품과 하품으로 선별하는 손길도 바쁘다. 이웃에서는 귤을 처음 땄다면서 노랗고 탱글탱글한 귤을 상자에 가득 담아 내 집에 갖다 주었다. 나는 귤나무에 매달린 귤들의 각각의 높이와 색감을 유심히 바라보곤 한다. 낮은 곳에, 꼭대기에, 햇살이 잘 드는 곳에, 그늘이 진 곳에 귤은 매달려 있다. 귤은 마치 걸음을 천천히 옮기듯이 노랗게 익고 있다. 귤은 완만한 언덕을 내려가는 것처럼 무르익고 있다. 더디지만 조금씩의 진전 속에 가을의 시간이 있다. 귤빛 가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또 하나는 아침 이슬이다. 이슬이 떨어져 흙은 축축하게 젖어 있다. 화단에도 이슬이 내려 국화의 꽃이 젖어 있다. 이슬에 젖은 꽃은 색이 선명하고, 그래서 생기가 있고, 더 이쁘다. 나는 꽃의 향기를 맡기도 하고 꽃을 손으로 만져보기도 한다. 국화에, 한 방울의 이슬에 가을이 들어 있다. 국화도 우주요, 한 방울의 이슬도 우주이다. 아, 나는 가을의 아침 이슬 속에 있구나,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을 조용한 거품 안에 가둬요.” 이 말은 영화 ‘디터 람스’에서 한 평론가가 디자이너인 디터 람스의 성품과 삶의 태도를 평한 말이다. 나는 이 말이 참 마음에 든다. 조용한 거품이라니. 물방울 속에 들어 있는 자아로 이해되기도 했고, 관조하는 자아로 이해되기도 했고, 평온과 자족을 얻은 자아로 이해되기도 했다. 우리도 관조하기에 좋은 가을의 시간을 살고 있다.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