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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고갈 빨라지는데 보험료 인상 수치 없이 국회로 공 넘겨

중앙일보

입력

정부는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에서 연금개혁에 필수적인 보험료율이나 소득대체율 같은 수치를 제시하지 않았다. 김상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초 전문가로 구성된 재정계산위원회가 18개 시나리오(이후 24개로 증가)를 펼쳐놓자 “윤석열 정부가 단일 개혁안을 내는 게 정공법”이라고 지적했지만, 허사가 됐다. 정부는 대신 실질소득 올리기, 기금운용 수익률 목표 구체화, 지급보장 명문화 등을 제시했다.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모습. 연합뉴스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모습. 연합뉴스

연금개혁의 목표는 20세 청년이 70년 후 90세가 됐을 때 문제가 없는, ‘70년 튼튼’ 연금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25년 동안 보험료율을 9%로 묶어 놓았고, 이로 인해 2040년 연금기금이 정점(1755조원)에 이른 뒤 이듬해부터 적자로 돌아서 2055년 소진된다. 이후 연간 적자가 급격히 증가해 2060년 350조원, 2090년 754조원으로 악화한다. 이렇게 되면 후세대가 소득의 30%(2060년), 35%(2080년)를 보험료로 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하루라도 빨리 보험료를 올려야 한다. 1960, 70년대 생이 은퇴하기 전에 기여금을 높이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험료(9%)를 두 배로 올려도 ‘70년 튼튼’ 연금이 될까 말까 하다. 재정계산위원회는 그나마 수용 가능한 대안으로 보험료 15%를 선호했다. 마지노선으로 12%도 나왔다.

윤석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보험료를 15%로 올리고 수급개시연령을 68세로 늦춰도 ‘70년 튼튼’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 상황이 이런 점을 고려하면 정부가 최소한 보험료 12% 안을 제시해야 했는데, 너무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종합운영계획에 사지선다형 안을 담았고, 정부와 국회가 손도 대지 않았다. 당시 야당인 국민의힘은 문 정부를 “미래를 보지 않는 무책임 정부”라고 맹비난했다. 그런 여당과 정부가 연금개혁의 첫 단추도 꿰지 않았다. 막판까지 내년 총선 영향을 따진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수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는 “현 정부는 전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3대 개혁을 외쳤다. 하지만 그 결과물이 이거냐. 전 정부를 비판할 자격이 있느냐”며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데 누가 표를 주겠느냐”고 지적했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도 “현 정부가 이도 저도 안 하는 모습으로 총선에 임하면 좋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다만 이창수 숭실대 정보통계보험수리학과 교수는 “보험료만 올려서는 안 된다. 수급개시 연령 상향, 자동안정화장치 도입, 기금운용 수익률 상향 등의 조치가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에 소득대체율(생애평균소득 대비 노후연금의 비율)을 언급하긴 했지만, 인상에는 선을 그어 논란을 부를 수 있다. 노동·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공적연금강화국민운동은 26일 공개한 ‘국민연금 대안 보고서’에서 2025년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고, 보험료율을 12%(2030년)로 올리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정부는 종합운영계획에서 소득대체율을 올리면 보험료를 추가로 올려야 하고 미래 세대 부담을 준다고 밝혔다. 소득대체율을 올려도 연금 증액 효과가 미미한 데다 그 효과가 한참 후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질소득을 올리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연금 늘리기 핵심은 가입기간을 늘리는 것이다. 국민연금 신규 수급자의 평균 가입기간이 18년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연금액이 높지 않다. 그래서 저소득 지역가입자 보험료를 지원하고 출산·군복무 기간을 연금 가입기간으로 인정하는 등의 지원책을 내놨다.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이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2023년도 제3차 국민연금 심의위원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이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2023년도 제3차 국민연금 심의위원회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뉴스1

종합운영계획에 새로 들어간 게 자동안정화장치 도입 또는 확정기여방식 전환 검토이다. 자동안정화장치는 출산율·기대수명·성장률 등을 따져 연금액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제도이다. 수명이 길어지기 때문에 연금액이 자동으로 삭감된다. 선진국의 70%가 도입했다.

이창수 교수는 “정치권에서 연금개혁을 제때 안 하기 때문에 자동장치, 확정기여방식 전환은 매우 의미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금 복지’를 강조하는 측에서 “이게 연금이냐”라고 비판할 수 있다.

연금개혁의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국회 연금개혁특위는 지금까지 9회 회의를 열었고, 내년 5월로 활동 시한을 연장한 상태다. 연금특위도 내년 4월 총선까지는 제대로 손을 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주호영 연금특위 위원장은 지난달 13일 국회 토론회 인사말에서 “(연금개혁이) 내년 총선 전에는 힘들겠지만 21대 국회에는 반드시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21대 국회는 내년 5월 29일 회기 끝난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내년 4월 10일 총선 후 49일이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선거가 끝나서 국회의원의 부담이 훨씬 덜하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여야가 개혁안에 합의해 법률을 개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단 국민연금의 급한 불은 끌 수 있다. 기초연금·퇴직연금 등의 개혁도 중요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임기 내 개혁 완수”를 주장해온 터라 구조개혁의 속도를 어떻게 낼지에 성패가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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