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시평

탈진실 시대를 사는 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2016년 옥스퍼드대학이 매 연말 발표하는 그해의 단어는 ‘탈진실’ 이었다. 탈진실이란, 객관적인 사실보다 감정이나 개인적 신념에 따른 주장이나 정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여론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현상을 말한다. 그해 영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하였고,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일들의 배경에 허위 조작 정보를 활용한 공작이 있었음을 안 것은 한참을 지나서였다.

전 지구적으로 분열과 갈등은 더 깊어만 가고 있다. 일례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나고 미국의 대학 캠퍼스는 서로 양측을 지지하는 편으로 갈라져 상대를 공격하고 반대편 지지성명이 나온 것을 이유로 기부약정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

주장과 확신 넘치는 탈진실 시대
각자 정체성 정치로 공통점 상실
불편한 보도에는 가짜뉴스 딱지
무분별 언론 공격은 공론장 위협

이러한 흐름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각자 의미를 두는 정체성에 따라 시민들이 쪼개지면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은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갖는다. 서로 다른 젠더이지만 주변 사람의 시선이나 인정 한마디에 힘을 얻거나 상처받는 똑같은 인간이고 서로 다른 정당을 지지하지만 모두 다음 세대의 번영을 염원하는 국민이기도 하다. 그런데 공통점은 희미해져만간다.

누구든 서로 비슷한 성향과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가 편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조차 그 안에서 맴돌게 되면 내게 보이는 세상이 전부이고 내 세계관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게 된다.

소셜미디어로 촘촘히 연결된 세상에서는 개인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즉각 정서적 공감을 주는 세세한 묘사를 담은 이야기가 전파력 있고 주목받기 마련이다. 알고리즘은 내가 끌릴 법한 이야기들을 귀신같이 내 앞에 대령한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탈진실 현상과 각자가 의미를 두는 하나의 정체성 속에 몰입하는 현상은 서로에게 동력을 주면서 강력해진다.

가짜뉴스라 부르는 현상은 이러한 환경을 먹고 자란다. 허위정보를 만드는 비윤리적인 사람이나 이를 믿거나 속는 어리숙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사실 가짜뉴스라는 용어부터가 문제다. 세상은 그리 단순하게 팩트와 팩트가 아닌 것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사실성을 검증한다는 팩트체킹조차 특정한 관점과 그에 따른 자료의 해석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가짜뉴스란 겉으로 형식상 언론보도인 것처럼 가장하고 있으나 뉴스 제작과정을 거치지 않은 정보를 말한다. 그런데 정치인들뿐 아니라 정책당국까지 앞장서 각자 불편한 정보는 죄다 가짜뉴스라고 부르니 무엇이 진짜 가짜뉴스인지, 그럼 진짜뉴스는 도대체 무엇인지 혼란만 더할 뿐이다. 지난 정부가 가짜뉴스로 인한 피해구제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며 비판했던 사람들은 이제 자리를 바꾸어 가짜뉴스가 국론을 분열하고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니 때려잡아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무분별한 가짜뉴스 공방은 확신의 광신이 넘치는 탈진실시대의 늪을 더 깊게 파는 길이다. 토론은 실종되고 맹목적인 적개심만 남기는 싸움만 보인다.

물론 허위조작정보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하지만 불편한 언론보도까지 싸잡아 가짜뉴스로 낙인찍는 것은 제도화된 사회적 대화에 대한 불신과 냉소주의를 부추기고 공론장으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하는 더 위험한 일이다. 정보의 늪에서 중심을 잡고자 하는 시민이 우선 경계해야 할 대상은 가짜뉴스 딱지를 남발하는 정치지도자들이다.

비록 언론의 현재 모습에 할 말은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진실의 시대에 시민들이 기댈 곳은 언론 밖에 다른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 권력 집단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과 감시가 무뎌졌을 때 그 사회는 죽은 사회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나 개인이나 성숙해진다는 것은 더 많은 다양성과 가능성들이 서로 부딪치고 때로 필연적인 부조화와 갈등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지 질서정연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논쟁적인 이슈일수록 성급한 가짜뉴스 딱지는 대화와 성찰의 과정을 봉쇄한다.

인공지능의 진화는 탈진실시대를 또 한차례 변모시킬 것이다. 미디어 기술과 제도를 담당하는 정책당국이 대비해야 할 과업은 그야말로 태산이다. 더 많은 팩트체킹과 양질의 저널리즘 교육을 지원하고 사회적 차원에서 정보 리터러시를 키워야 한다. 딥페이크나 알고리즘 조작을 통한 허위조작 정보 문제, 인공지능의 부상에 따른 저작권 질서의 재정립,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 혐오표현을 규제하는 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양립시킬 수 있는지 하나하나 만만치 않은 과제들이다. 이러한 시기에 가짜뉴스 때려잡기에 올인하는 듯한 올드한 모습에 탈진실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시민들은 마음이 편치 않다.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