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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재승의 퍼스펙티브

미·중 갈등 파고…한국은 ‘같은 배’ 탄 유럽과 공조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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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거세지는 중국의 압박, 가치와 실용 사이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

지난 9월 중순 이탈리아 코모 호숫가에 자리 잡은 콘래드 아데나워 전 독일 총리의 별장에 유럽과 미국, 한국과 일본, 인도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주요 인사가 속속 도착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아데나워 재단의 글로벌전략자문그룹 회의가 열렸다. 유럽의 시각에서 보는 세계 질서 속의 동맹과 경쟁자 재편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다.

유럽과 미국은 세계 질서 격변기에 ‘뜻을 같이하는 국가들’이 민주주의와 법치를 기반으로 더욱 견고하게 협력해야 함을 강조했다. 반면 비서방 국가들은 서방이 만들어 낸 가치를 강요하지 말라며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실용주의가 불가피한 선택임을 외쳤다. 가치 외교에 대한 우선순위 부여는 서방(West)과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라고 불리는 비서방 국가를 나누는 원칙이 되고 있었다. 한국은 이 둘 사이 어디에 놓여있을까.

팬데믹·우크라 전쟁 겪으며 중국에 대한 유럽의 태도 달라져
중·러 밀착에 경계심…중국과 거리 두며 인권·법치 문제 거론
유럽 혼자론 역부족, 서방 일원이 된 한국의 외교 연대 필요
원칙 없는 실용주의는 협상력 해쳐…가치가 국익이 될 수도

서방 국가와 ‘글로벌 사우스’의 대립

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한국은 ‘서방’이었다. 경제 규모로나, 외교 노선으로나 한국은 미국·유럽·일본이 바라보는 세계관과 크게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한국이 서방의 한 축이라는 사실에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나토(NATO) 정상회의와 G7 정상회의에 초대받는 한국이 서방이 아니라고 하는 게 더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아직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한국이 무슨 서방이냐는 내부의 날 선 비판도 일견 타당하지만, 밖에서 보는 한국은 이미 서방으로 편입되었고 그렇게 행동하기를 요구받고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볼 때 유럽이 당면한 국제 문제는 한국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 특히 중국 문제는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다. 미·중 경쟁 속에 깊숙이 끼어버린 정치, 경제적 딜레마 속에서 가치 외교와 실용 외교를 공존시키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그 방법은 무엇인지에 대해 유럽과 한국은 동병상련의 입장이 되어가고 있었다.

‘일대일로’ 투자 약속 못 지켜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중국이라는 거대한 경제권을 상대로 실용주의를 추구하지 않는 나라는 거의 없다. 중국 경제와의 단절은 냉엄한 실리를 추구하는 국제무대에서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공급망 재편과 경제안보를 강화하는 미국도, 이에 동참 압력을 받는 동맹국인 유럽과 한국도 중국과의 연계 전략을 어느 수위에서 잡아야 할지 서로의 입장을 조심스럽게 관찰하고 있다.

유럽의 대중 관계는 몇 년 사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2010년대 중반 중국은 일대일로 전략의 서쪽 끝을 유럽으로 설정하고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다. 중·동유럽, 발칸 반도국을 상대로 ‘16+1’ 체제를 출범시키고, 해당 국가 지도자들을 시진핑 주석 양옆으로 도열시켰다. 프랑스·독일을 비롯한 서유럽과 유럽연합(EU)은 긴장했다. EU는 2018년 이후 ‘연계(Connectivity)’ 전략을 발표하며 중국으로 기울어지는 회원국을 아우르는 한편 아시아를 향한 동진 전략을 구사했다.

하지만 2023년 유럽의 중국몽은 코로나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갈등이라는 세 개의 전환점을 거치면서 정반대 양상을 보인다. 중국이 약속한 투자가 실제로 들어오지 않으면서 중·동유럽 국가들은 급속히 중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 옛 소련 시절의 기억을 뼈저리게 간직한 이들 국가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 편을 드는 중국보다 나토와 미국과의 연대를 공고히 했다.

‘전략적 자율성’ 찾는 독일·프랑스

반면 대중 무역 비중이 높은 독일·프랑스는 정치적으로 거리를 두면서도 ‘전략적 자율성’이 발휘될 공간을 절실히 찾고 있다. 2020~22년 중국에 대한 EU 투자액 1472억 유로 중 62%는 독일(320억 유로), 프랑스(170억 유로), 네덜란드(137억 유로) 등 서유럽 국가의 비중이 월등히 높다. 대중국 리스크는 이제 동유럽에서 서유럽으로 옮겨갔다.

그럼에도 유럽이 중국에 대해 양보하지 않는 것은 인권과 법치와 같은 가치의 문제다. 2021년 3월 EU가 신장 위구르족 인권 문제를 이유로 중국 관리와 관련 단체를 제재하자, 중국은 유럽의회 의원과 EU 이사회 정치안보위원회를 보복 제재 리스트에 올렸다. 외교 무대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EU에 대한 직접적인 제재를 가한 중국에 대한 유럽 각국의 입장은 싸늘해졌다.

이어진 중국의 거친 전랑외교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중국에 대한 호감도를 순식간에 끌어내렸고,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긴밀해진 중국·러시아 관계는 유럽의 경계심을 더욱 높였다. 가치 체제에 있어서 중국과 유럽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장벽이 만들어졌고 투자협정을 비롯한 여러 제도적 관계도 경색되었다.

달라진 중국, 대응 방식도 변해야

유럽 경제의 중추를 이루는 독일에서 경제를 어떻게 정치와 분리할 것인가는 대중 전략의 가장 큰 고민이 된다. 독일의 대중 정책은 오랫동안 ‘무역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Handel)라는 원칙을 바탕으로 자동차·기계·전자·화학 등 기업 이익에 핵심을 두어 왔다. 중국은 7년 동안 독일의 최대 교역국이었고, 교역액과 투자액 모두 상승세에 있다.

하지만 중국을 대하는 독일의 기조는 바뀌고 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중국이 변했기 때문에 접근 방법도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시진핑 주석의 3연임이 확정된 후 대규모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중국으로 향했던 숄츠 총리는 “똑똑한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독일은 지난 7월 처음으로 채택한 대중국 전략에서 규칙 기반 질서의 원칙보다 일당 체제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중국을 체제적 경쟁자로 규정했다. 대만 문제, 인권, 스파이, 허위 정보 등 국가 안보 전략 차원에서 중국에 대한 우려와 경고가 커졌고, 이에 맞서는 미국과의 경제 관계와 대서양 동맹을 최우선으로 강조했다. 중국의 경제적 강압으로 고통받는 다른 EU 회원국과 연대할 것도 분명히 했다.

기술·법치 파트너로 한국 비중 커져

분명 독일은 ‘아직도 우유를 주고 있는 소’를 도살할 생각은 없다. 중국 시장은 너무나 중요하다. 하지만 실용이 가치 체제를 넘어서서 원칙이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질서의 독일이 무너지면 유럽은 와해한다. 독일 역시 혼자서는 중국을 상대할 수 없기에 유럽 내에서, 또 국제적으로 믿을 수 있는 국가들과의 연대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기술 파트너로서, 법치의 파트너로서 특히 한국과 일본은 숙명적으로 그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중국은 여전히 매력적인 시장과 투자를 무기로 유럽을 갈라놓으려 하고, 유럽은 ‘따로 또 같이’ 중국에 대한 대응책을 만들어낸다. 중국과 유럽 간의 힘겨루기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녹색당 출신으로 대중 강경파로 알려진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교장관은 얼마 전 시진핑 주석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같은 “독재자”라고 말했다가 중국 외교부의 맹렬한 반발을 가져왔다.

그 직전에 EU는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 지급에 대해 관세를 부과할 것을 발표하며 중국과의 무역 분쟁을 예고했다. 경기 침체라는 절박한 위험을 앞에 두고 중국과 유럽은 서로 샅바를 움켜쥐고 있다.

쉽게 가는 실용 노선은 오래 못 가

가치와 동맹이 합쳐지면 협상력이 커진다. 개별 국가 차원의 양자 관계에서 중국을 효과적으로 상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은 전과 같이 공고하지 못하다. 미국은 혼자 서방을 이끌 수는 없고, 유럽 역시 마찬가지이다. 파트너가 필요하다, 미국과 일본은, 그리고 유럽과 한국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따지고 보면 서방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서방에 끼었다고 자축할 일도 아니다. 민주주의나 법치·인권 같은 가치가 밥 먹여 주냐, 오히려 경제적 손실만 가져올 것이라는 반발에도 맞서야 한다.

동시에 브릭스(BRICs)를 비롯한 비서방 국가들과의 경제적 연계도 필요하다. 하지만 가치가 국익이 되는 나라들이 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안보적 연대가 절실한 국가가 있는가 하면, 무역 체제나 법치 규범이 경제적 이익을 담보해 주는 국가가 있다. 오랜 기간 피를 흘려 자유와 인권을 쟁취했던 나라들은 그 가치가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원칙이 되고 있다.

어느새 어른이 돼 버린, 서방 진영에 서게 된 한국의 대중 전략은 ‘반드시 지켜내야 할 가치와 원칙’을 명확히 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걸 바탕으로 실용적인 세부 전술이 나올 수 있다. 그 가치와 원칙이 있고 없고에 따라 국가의 격과 함께 가야 할 파트너십이 달라진다. 쉽게 가는 실용 노선은 오래 갈 수 없다. 가치 외교를 바탕으로 한 연대의 확대가 법치에 기반을 둔 대중 전략의 입지를 강화할 수 있다. 유럽과 한국이 고민하는 답은 여기서 공유된다.

이재승 고려대 국제학부 교수·일민국제관계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