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정재홍의 시선

바이든과 시진핑, 가까워질 수 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정재홍 기자 중앙일보 부데스크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정재홍 국제외교안보에디터

미국 정부는 지난 17일 낮은 사양의 인공지능(AI) 반도체에 대해서도 중국 수출을 금지하기로 했다. 미국 상무부가 지난해 10월 첨단 AI 반도체 수출을 금지한 뒤 엔비디아가 속도를 낮춘 반도체를 개발해 중국에 수출하자 규제의 폭을 넓힌 것이다. 중국은 이에 맞서 지난 20일 배터리 핵심 소재인 흑연 수출을 오는 12월부터 통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는 전 세계 전기차와 배터리 업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중국산 흑연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한국의 관련 업계에 적지 않은 타격이 될 전망이다.

미·중의 수출 규제는 다음 달 11~1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나왔다. 이 회의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참석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회담을 할 가능성이 크다. 양국 관계가 개선되는 조짐을 보이는 국면에서도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중 대립은 거세지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은 멈추지 않아
한·미·일 협력 체제를 기반으로
중국과의 경제 협력 넓혀가야

미국 주도로 글로벌 공급망 등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는 디리스킹(derisking·탈위험)은 중국과 밀접한 한국 경제에 큰 피해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 18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디리스킹이 본격화하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이 4% 가까이 줄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일본·유럽연합(EU)의 1%대, 미국의 0%대 손실을 웃돈다.

미국은 바이든 대통령 취임 이후 중국 문제를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정권에서도 중국 견제에 나섰지만 범정부 차원의 정책이나 세계적 공조가 없어 한계가 컸다. 바이든 정권은 지난해 10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중국을 최대 지정학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중국에 맞서 경제·안보·정치 등 모든 요소를 통합한 종합 전략을 마련하며, 동맹·파트너 국가들과 연대할 것을 천명했다. 이 연장선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쿼드(QUAD, 미·일·인도·호주 협력체), 칩4(한·미·일·대만 반도체 동맹), 오커스(AUKUS, 미·영·호주 안보협력체),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등이 나왔다.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극심한 정쟁 속에서도 중국 견제에는 일치하고 있어 중국 견제 정책은 정권과 관계없이 지속할 전망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 공화당 내 극우파들이 자기 당 소속 하원의장을 해임한 사례에서 보듯 진영 갈등이 극심하다. 내년 11월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을 이긴다면 보호주의와 미국 우선주의가 드세질 수 있다.

중국은 시 주석을 중심으로 미국의 중국 견제에 맞서고 있다. 마오쩌둥 이래 중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쥔 시 주석은 자신의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사상’에 따라 중국이 결국 미국을 물리치고 세계 최고의 국가로 부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 주석은 모든 중국인이 풍족하고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샤오캉(小康) 사회 실현과 중화민족 부흥이란 중국몽(中國夢)을 꿈꾼다.

문제는 마르크시즘을 앞세운 시진핑 사상이 현실과 동떨어질 때가 많다는 점이다. 시 주석은 공산당 일당 독재나 공동부유 정책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인터넷 플랫폼이나 교육·문화오락·콘텐트 등에 철퇴를 가해 해당 산업이 고사 위기를 맞고 있다. 또 코로나 시기에 펼친 제로 코로나 정책은 개인보다 전체, 경제보다 정치, 합리보다 이념이 앞서며 불필요한 고통을 안겼다. 탕핑(躺平, 열심히 일하지 않고 평평하게 누워있기), 룬쉐(潤學, 이민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 열풍은 공산당 억압에 맞서는 중국인의 소극적인 저항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대외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미·중이 협력하는 국제 체제가 최선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사라졌다. 미·중 전략경쟁이 기정사실이 된 만큼 이에 맞는 대응책을 찾아야 한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이를 억제하기 위한 한·미 동맹 강화는 불가피하다. 윤석열 정부가 전향적으로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며 한·미 동맹은 더욱 굳건해졌다. 강제 징용, 후쿠시마 오염수 등 현안을 관리하며 일본과의 관계를 다지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그렇다고 중국과의 관계를 방치할 수는 없다. 중국은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다. 한국 경제가 쇠퇴할 경우 한·미·일 협력 체제에서 한국은 주니어 파트너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미·중 경쟁 속에서 한국이 운신의 폭을 넓히려면 유럽연합(EU)·호주·인도·캐나다 등 비슷한 가치를 공유한 국가들과의 협력도 필수적이다. 정권에 따라 친미·친중 어느 한 편으로 쏠리는 걸 막으려면 대외 정책만큼은 진영이 아닌 국익에 기반한 국민 공감대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