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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요절 감독 노필, 2023년에 되살린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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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나원정 기자 중앙일보 기자
나원정 문화부 기자

나원정 문화부 기자

광복 후 개봉한 50번째 한국영화 ‘안창남 비행사’(1949)는 신인 노필 감독의 데뷔작이다. 동명의 주인공이 혈혈단신 일본에 가 비행사 시험에 수석 합격해 식민지 조선의 울분을 달랬던 전기영화다. 당시 20대 초반이던 노 감독은 나이 서른에 요절한 청년 비행사의 고난사에 깊이 공감했다. 그 자신도 황무지 같던 영화판에서 고군분투해서다.

그는 음악영화에 열정이 있었지만, 빚에 쫓겨 통속극을 찍었다. 1966년 16편을 남기고 불과 38세에 세상을 떠났다. 유고작 ‘밤하늘의 부루스’(1966)는 주연 최무룡에 이미자의 노래가 화제를 모으며 서울 9만여 관객을 모으며 성공했다. 하지만 허가받은 제작자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당시 영화법 때문에 제작 명의를 빌리는 데 수백만원을 빚져야 했다. 1세대 영화평론가 김종원에 따르면 당시 망자의 호주머니엔 시계를 팔아 마련한 자신의 장례비 3600원이 전부였다. 시쳇말로 해방 조선의 ‘존버 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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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2일 개봉하는 백재호 감독의 ‘붉은 장미의 추억’은 노 감독의 1962년 동명 영화를 리메이크했다. 신영균·김지미 주연의 원작은 살인 누명을 쓴 탈옥수와 아버지를 찾는 여가수의 로맨스. 백 감독은 필름이 사라져 대본만 남은 원작을 현대 배우들이 낭독극으로 준비하는 상황으로 재해석했다.

극 중 연기가 안 풀려 답답한 배우들 앞에 의문의 ‘감독’(김영민·사진)이 나타나, 낭독극을 맛깔나게 살려준다. 마치 노필 감독이 부활한 듯한 이 캐릭터의 고충이 요즘 청년 세대와 겹쳐지며 60년 시차를 단숨에 뛰어넘는다. 한국영화계는 1990년대 후반 산업화를 전후로 신구 세대가 교체됐다. 오마주로도 좁혀지지 않던 세대차를 잇는 방법은 이런 공감 찾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