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포브스] 이경률 SCL 헬스케어 그룹 회장_한국 진단의학계의 퍼스트 펭귄

중앙일보

입력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은 진단검사 전문기관 SCL 헬스케어 그룹이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으로 사업을 확장해 100년 기업으로 도약할 방침이다. 디지털 시대에 전 세계 수많은 기업이 ‘디지털 헬스케어’를 외치지만, SCL의 다짐이 남다른 이유는 그동안 누적된 빅데이터와 고도의 전문성 때문이다

서울의과학연구소와 하나로 의료재단, SCL 바이오뱅크, 이노테라피 등을 두루 아우르는 SCL 헬스케어 그룹의 이경률 회장.

서울의과학연구소와 하나로 의료재단, SCL 바이오뱅크, 이노테라피 등을 두루 아우르는 SCL 헬스케어 그룹의 이경률 회장.

한국 사회에서 ‘너무 앞서 나갔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다. 시대 흐름에서 한 걸음 앞질러 가면 도전 정신을 격려하기보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고 나무란다. 하지만 1983년 설립된 SCL 헬스케어 그룹(이하 SCL)은 세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진단검사의학 불모지였던 한국에 ‘검체 검사·건강검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1980~1990년대 국내 최초로 임상병리 수탁검사기관인 ‘서울의과학연구소’와 건강검진 전문기관 ‘하나로 의료재단’을 설립한 SCL이 어느덧 40돌을 맞았다.

현재 SCL을 이끌고 있는 이경률(63) 회장은 고(故) 이은범 범양사 회장의 차남이자 고 이규범 전 진단검사의학회장의 조카로, 연세대 의대에서 진단검사의학을 전공하고 10년간 교수로 재직했다. 특히 1991년 캐나다 임상역학자 고든 기얏(Gordon Guyatt) 교수가 발표한 근거중심의학(Evidence Based Medicine·EBM)에 심취했던 이경률 회장은 1990년대 중후반 미국으로 건너가 스크립스 연구소(Scripps Research)에서 ‘혈액 내 암 물질 조기 검출 방법’을 연구했다. EBM은 환자를 치료할 때 반드시 객관적·과학적 근거와 의사의 경험이 통합되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당시만 해도 EBM은 국내 대중에게 생소한 개념이었습니다. 진단·병리검사 결과에 따른 과학적 진단보다 의사의 임상 경험에 의존도가 높은 시절이었죠. 하지만 미국 연수에서 예방의학의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국내에도 EBM이 반드시 구현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향후 국내 의학이 발전하면 진단·검사 기관을 찾는 수요도 늘어날 것이란 확신도 있었고요.”

선대 회장의 창업가 정신을 그대로 물려받은 그는 2010년 질병 진단 기법을 연구개발하고 신약 개발 관련 임상시험을 분석하는 벤처기업을 차렸다. 오늘날 SCL 헬스케어로 불리는 이 기업은 서울의과학연구소와 하나로 의료재단, 인체유래물은행 SCL바이오뱅크, 의약품 수출·판매업체 이노테라피 등을 관계사·계열사로 두고 있다. 이 회장은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그룹의 수장이다. 지난 7월 11일 하나로 의료재단 종로센터에서 만난 이 회장에게 ‘100년 기업으로 향하는 SCL 로드맵’과 ‘K-메디컬의 미래’를 물었다.

한 발 앞선 도전과 혁신

남극 펭귄은 겁이 많다. 이들 중 용기 있는 펭귄 한 마리, 퍼스트 펭귄이 먼저 바다로 뛰어들어야 나머지 펭귄들도 연이어 물속으로 향한다. SCL은 국내 진단검사의학계에서 퍼스트 펭귄을 자처해왔다. 1992년 국내 최초로 PCR(중합효소연쇄반응) 검사를 도입했으며, 1998년에는 미국병리학회(College of American Pathologists·CAP)로부터 검사실 품질 인증을 획득했다. SCL은 지속적으로 검사 역량을 강화해 2003년에는 검사실 자동화시스템을 도입했으며 현재 검사 가능한 항목은 4000여 개에 이른다.

근거중심의학(EBM)에 매료된 이유는.

진단검사의학은 환자의 혈액, 체액, 소변 등 검체에서 채취한 분자 및 세포 성분을 분석해 질환을 진단하고 치료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줄이려면 검사 결과의 정확도가 중요하다. EBM은 검사 데이터의 정확성과 진단의 객관성을 강조한다. 진단검사의학이 전국 각지에 수많은 명의를 배출하려면 EBM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역사회의 명의 양성’이 창업 목표였나.

단기 목표 중 하나였고 이는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환자마다 신체적 특징이나 질환의 양상이 제각각이므로 의사가 주관적 경험만을 바탕으로 진단·치료하는 폐단을 없애야 한다. 한국은 상급의료기관 쏠림현상이 심각하다. 환자들이 동네 병원보다 대형 의료기관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웬만한 질환은 가까운 지역사회의 중소형 병원이 해결할 수 있어야 쏠림현상이 완화되고 의료 형평성도 증대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SCL은 지역 의사에 대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병의원에서 환자의 건강상태와 질환 여부를 알기 위해 검사를 의뢰하면 축적된 전문성을 기반으로 정확도 높은 데이터를 제공한다.

의대 교수가 아닌 벤처 창업가로서 고충은 없었나.

창업 초반에는 연구 과정도 어려웠고 그 결과를 상업화하는 일도 힘들었다. 2000년 의약분업 시행 즈음 식품의약품안전청(현 식약처)과 대한의사협회는 일반 의사의 복제 의약품(제네릭 의약품) 사용을 허가했다. 복제 의약품은 약효 동등성이나 생동성을 실험하여 생산되므로 오리지널 의약품과 약효가 같고 오리지널의 특허 기간이 만료되면 저렴한 가격에 시판이 가능하다. 오리지널과 성분, 함량, 제형, 용법·용량 등이 동일한 수준이라는 전제하에서다. 당시 SCL은 복제 의약품의 생동성 시험을 시작했다. 생동성 시험은 약품이 몸에 미치는 영향이 동등한지 평가하는 시험으로, 생물학적 동등성이 입증된 제네릭 의약품은 유효성과 안전성을 담보한다고 볼 수 있다. 약학계의 견제가 심해 어려움이 많았다.

부친께 받은 경영상 조언이 있다면.

부친께서는 시대 변화에 맞게 사업을 다각화하는 데 유연하셨다. 그때 얻은 교훈 중 하나가 ‘사업 목표가 뚜렷하지 않은 기업은 실패하기 쉽다’는 것이다. 또 부친께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자세를 배운 덕분에 여러 사람이 다 함께 하나의 목표를 위해 일한다는 인식이 일찍이 몸에 배어 있었다. 실제 경영 일선에 나서 보니 어느 부서든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고 어떤 직원이든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부서 간 서열이 없다고 보고 각 부서가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나부터 앞장섰다. ‘대접을 받고 싶으면 먼저 상대를 대접하라’는 말이 있지 않나. 직원의 인격과 역량을 존중하는 리더십을 경영방침 1순위로 삼았다. 직원을 신뢰하고 자율성을 보장하니 직원이 자발적으로 솔선수범했다. SCL의 뿌리 깊은 조직문화다.

예방의학과 개인 맞춤형 의료

SCL은 지난 2016년 질병관리청으로부터 운영허가를 받아 인체유래물은행 SCL바이오뱅크를 설립했다. 연구용 검체를 확보해 국내 연구진의 편의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협업을 통해 예방의학과 정밀의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이다. SCL은 장기간 건강상태 데이터를 수집·관찰·추적하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의 향후 질환 발생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기초 데이터를 의료연구기관에 제공한다. 개인 맞춤형 의료의 포문을 여는 셈이다. 이 외에도 SCL은 체외진단 의료기기 성능평가, 임상시험 검체·의약품 운송 등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확장하는 중이다.

업계에서 SCL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전문성과 정확도는 국내 최고 수준이다. 지난 몇 년간 실적이 대폭 개선된 것은 병의원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선제적으로 구축했기 때문이다. 앞서 도입한 PCR검사와 야간검사 자동화시스템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빛을 발했다. 간소화된 프로세스와 신속하고 정확한 데이터분석 능력, 빠른 전달체계 등이 삼박자를 이뤘다고 볼 수 있다. IT(정보기술) 도입으로 검사실 업무량이 줄어든 만큼, 인력을 분자진단검사 등 특수 검사에 재배치해 업무 효율성을 높였다.

열쇠는 빅데이터 활용에 있겠다.

그렇다. 과거 아날로그 방식과 달리 검진검사 기록이 일렉트로닉 레코드로 저장되기 때문에 빅데이터를 쉽게 모을 수 있다. 관건은 빅데이터를 어떻게 가공하느냐에 달려 있다. 말하자면 원유가 넘쳐 나는 상황에서 누가 먼저 탐사에 뛰어들어 석유를 뽑아내고 정제하느냐가 중요한 시기다. SCL은 빅데이터에 인공지능(AI) 기술을 접목해 디지털 의료 및 헬스케어에 혁신을 일으킬 계획이다. 이를 위해 데이터분석 알고리즘을 고도화하고 바이오마커(몸 안의 변화를 알아낼 수 있는 지표·biomarker) 발굴을 위한 연구에 매진할 방침이다. 이로써 질병의 발병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게 되면 맞춤형 건강관리 솔루션과 플랫폼을 새롭게 선보일 계획이다.

몽골, 중국, 인도네시아 등 해외 진출도 활발하다.

2003년 몽골 울란바토르에 있는 모바이오랩(MobioLab)을 시작으로 SCL의 선진화된 진단검사 시스템을 수출하고 있다. 중국(Dian Lab), 인도네시아(K-Lab), 페루 등에 진출한 상태고 내년 초에는 베트남으로 사업 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지난 1월 오픈한 인도네시아의 ‘K-랩’은 국내 SCL 검사실을 그대로 옮기다시피 했다. 궁극적으로 SCL이 K-메디컬 바람을 일으켜 메디컬 투어리즘(medical tourism)을 활성화해 국내 의료기관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을 늘리고 싶다. 관광객이 병의원에서 진료·치료를 받으면서 휴식도 즐기는 연결고리가 되고자 한다. K-메디컬이 전 세계 헬스케어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파이를 키워나가리라 확신한다.

- 노유선 기자 noh.yousun@joongang.co.kr _ 사진 최영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