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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그리워 시인이 된 소년, 그 아빠가 그린 ‘약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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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민병훈(54·왼쪽) 감독은 암으로 엄마를 여읜 아들 시우(11) 군이 시를 쓰며 보낸 치유의 시간을 영화로 담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민병훈(54·왼쪽) 감독은 암으로 엄마를 여읜 아들 시우(11) 군이 시를 쓰며 보낸 치유의 시간을 영화로 담았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유치원 졸업식 직전 엄마를 여읜 민시우(11)군. 2016년 엄마가 폐암 선고를 받은 뒤 정착한 제주도 애월 숲속 집에 영화감독인 아빠 민병훈(54)씨와 단둘만 남았다. 아빠 품에 안겨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먹였던 소년은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인이 됐다. 마음에 맺힌 눈물을 말하는 짧은 글이 시가 됐다.

“비는 매일 운다/ 나도 슬플 때는 얼굴에서 비가 내린다/ 그러면 비도 슬퍼서 눈물이 내리는 걸까?” 시우군이 쓴 첫 시 ‘슬픈 비’다. “바람은 엄마의 노래/ 안개는 엄마의 숨소리”(‘엄마 눈동자’) “엄마가 나에게 다가오는 바다”(‘사랑의 바다’) …. 마당의 대나무, 이따금 찾아오는 노루, 때 이른 첫눈까지, 엄마가 사랑한 자연에서 엄마 흔적을 찾던 감수성 예민한 소년의 마음이 애틋한 사모곡을 빚어냈다.

다큐 ‘약속’

다큐 ‘약속’

지난해 12월 24일 성탄 선물처럼 펴낸 민시우 동시집 『약속』(가쎄)의 부제는 ‘언젠가 만날 수 있어!’. 지난 1월 KBS 휴먼 다큐멘터리 ‘자연의 철학자들’에 이어 8월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시 쓰는 제주 소년으로 소개돼 화제를 모았다.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약속’)는 엄마 약속을 되새기며 “제가 죽을 때/ 봄이었으면 좋겠다”고, “벚꽃을 손에 들고/ 엄마한테 선물을 주고 싶기 때문”(‘네 번째 일기’)이라는 어린 시인 앞에서 MC 유재석·조세호도 눈시울을 붉혔다.

시를 쓸수록 깊어지는 아들의 일상을 아버지 민 감독이 카메라에 담았다. 제주에서 찍은 전작 ‘기적’(2020)의 각본을 맡았던 아내 안은미 작가의 생전 모습부터, 사무치는 그리움을 신비로운 제주 풍광에 새긴 장면들과 함께다. 그렇게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가 다음 달 1일 개봉하는 ‘약속’이다. 영화는 이달 초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다.

다큐 ‘약속’

다큐 ‘약속’

민 감독은 러시아 국립영화대를 졸업한 뒤, 타지키스탄 시골 교사의 분투를 그린 데뷔작 ‘벌이 날다’로 이탈리아 토리노영화제 대상, 그리스 테살로키니영화제 은상을 받으며 작가주의 감독으로 주목받았다. 도박 빚을 안고 우즈베키스탄에 낙향한 바이올린 연주자(‘괜찮아, 울지마’), 사랑 앞에 흔들리는 신학도(‘포도나무를 베어라’), 알코올 중독과 불신으로 삶이 무너진 사격선수 부부(‘터치’), 영감이 멈춘 중국 현대미술 거장(‘펑정지에는 펑정지에다’) 등 삶에 대한 질문을 스크린에 담아왔다. ‘약속’은 오랜만에 영화제가 아닌 극장 개봉으로 선보이는 작품이다.

지난 17일 아들과 함께 시사회에 참석한 민 감독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가족을 처음 드러낸 감정을 “오묘하다”고 표현했다. “잊지 않으려고 쓴 시와 편지로 아이에게서 다시 엄마 모습을 목도하고 공감하게 해주려는 게 처음 취지였다”며 “누구나 죽음을 목도하고 슬픔과 상처를 겪는다. 이 영화가 그런 분들과 연대하고 공감하는 희망적인 치유,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마지막 편집 때 그 가능성을 봤다”고 말했다.

다큐 ‘약속’

다큐 ‘약속’

시는 어떻게 쓰게 됐나.
(시우)“학교에서 시를 배운 날 선생님이 잘 쓴다며 집에서 써보라고 하셨다. 집에 오자마자 시를 써보려고 하는데 비가 많이 왔다. 눈물이 떠올라서 ‘슬픈 비’를 써서 아빠한테 보여드렸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계속 쳐다보기만 하다가 며칠 뒤 재능 있다고 해주셨다.”
책을 많이 읽나.
(시우)“책은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읽어야 할 땐 읽는다.”
(병훈)“동시보다 허수경·나태주·허연 시집을 권했다.”
시가 뭐라고 느끼나.
(시우)“일기같이 편하게 글을 이어가는 것, 살짝 내 인생을 바꾼 것.”
축구도 좋아한다던데. 장래 희망은?
(시우)“몸이 불편한 분들에게 공감하고,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사람.”

‘약속’의 마지막 부분은 부자의 일상을 되감기를 하듯 편집했다. 그렇게 거꾸로 흐른 시간은 영화 첫 장면 생전 엄마와 시우가 산책하던 날에 이른다. 시우군이 “엄마가 저를 품에 안고 ‘시우야 사랑해’ 말하는 장면, 아빠와 카드게임 하는 웃긴 장면과 함께 가장 좋아한다”고 꼽은 장면이다. 민 감독은 “첫 장면과 엔딩이 교체되듯이, 시우를 다시 아이로 되돌려주고 싶은 시선이 이 영화의 지향점”이라며 “다들 (죽은 뒤) 천국을 얘기하는데, 그게 아니라 우리는 다시 태어날 때로, 순수한 시절로, 엄마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주제를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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