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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로 17년 망명 버틴 위고, 글 속에 ‘사랑의 와인’ 흘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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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1호 24면

와글와글, 와인과 글

2019년 화재를 겪은 후 복원 중인 노트르담 대성당 재건안 이미지. [사진 boredpanda]

2019년 화재를 겪은 후 복원 중인 노트르담 대성당 재건안 이미지. [사진 boredpanda]

독일에 괴테가 있다면 프랑스에는 빅토르 위고가 있다. 살아 있을 때 국민 작가 반열에 올랐으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건축에 관심이 높았을 뿐 아니라 83세에 숨을 거둔 것까지 두 사람은 공통점이 참 많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장수였다. 두 사람 모두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이 넘쳤고 평생 와인과 글을 가까이 한 와글와글 인생이었다.

괴테가 “나쁜 와인을 마시면서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고 예찬했다면, 위고는 “신은 물을 창조했을 뿐이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는 명언을 남겼다.

괴테가 20대 중반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쓰고 주인공이 마시다 남긴 포도주를 통해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슬픔을 전한 것처럼, 위고도 1831년 29살에 첫 출세작 ‘파리의 노트르담(Notre Dame de Paris)’을 발표한다. 위고는 이 소설에서 포도주를 통해 종지기 콰지모도의 애절한 감정을 전하고 있는데, 노트르담 성당 대피소에서 에스메랄다에게 빵과 함께 포도주를 건네는 장면이 그것이다. 욕망으로서의 와인, 결핍으로서의 와인이 아닌, 순수한 사랑으로서의 와인이었다. 중세유럽 교회에서 포도주는 생명수를 의미하니까.

위고가 태어난 곳은 브장송. 로마네 콩티 같은 최고급 와인이 생산되는 부르고뉴 지역과 가깝다. 포도주가 풍요로운 지역 출신답게 위고의 인생에는 언제나 포도주가 흘렀고, 그의 소설 속에서도 포도주가 자주 흐른다.

말년의 빅토르 위고. [사진 위키피디아]

말년의 빅토르 위고. [사진 위키피디아]

“포도주의 향연을 즐기는 프랑스인으로서 맥주 따위나 들이키는 플랑드르인들을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환대해야 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플랑드르는 현재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일부 지역으로 한때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기에 포도주 문화권에서 볼 때, 맥주 문화권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추기경으로부터 외교단이 어떤 음식을 대접받았는지 묘사하는 대목을 읽어보자. “흰, 연분홍, 진홍색 향료 포도주 더불쿼트로 12병, 리옹산 금빛 편도과자 24상자, 한 자루에 2리브르나 하는 횃불 24자루, 본에서 생산된 백포도주와 연분홍색 포도주 2백 리터들이 6통, 그것도 최고급이었다.” 여기서 본(Beaune)은 부르고뉴 와인이 거래되는 포도주의 중심 도시다. 거지 패거리가 몰려있는 지역에서 물을 마시려고 하자 여인들이 제지하는 대목에서도 중세인들의 위생에 대한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안 됩니다. 이 한겨울에 물은 마실 게 못 돼요. 향료 포도주를 조금 드세요.”

이 작품은 15세기 센강이 흐르는 파리 시테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배경이다. 성당 어두컴컴한 구석 벽에 새겨진 그리스어 대문자 ‘아난케(ΑΝΑΓΚΗ)’를 발견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숙명’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 신화 속 여신과 단어의 신비함,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몰입하게 만드는, 유혹하는 글쓰기의 달인이다. 저주받은 사나이의 사랑, 엇갈린 출생의 비밀은 흥미를 유인하는 요인이다.

미국에서 출간될 때 ‘노트르담의 곱추’라 번역되었던 제목 때문에 이 소설은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에 대한 곱사등이 종지기 콰지모도의 애절한 사랑, 그녀의 미모에 눈이 먼 가톨릭 부주교 클로드 프롤로의 탈선 이야기 정도로 알려져 있다. 육감적인 여배우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앤서니 퀸이 열연한 영화 ‘노틀담의 꼽추’(1957)의 영향도 컸다. 하지만 이는 11장으로 이뤄진 대서사시의 여러 주제 중 하나일 뿐이다.

프랑스의 유명 와인 산지인 부르고뉴(영어로는 버건디라 불리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레드 와인. 피노 누아 품종으로 만들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유명 와인 산지인 부르고뉴(영어로는 버건디라 불리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레드 와인. 피노 누아 품종으로 만들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노트르담은 프랑스어로 ‘우리의 귀부인’으로 성모 마리아를 뜻한다. 원작 제목이 말하듯 이 소설은 850년 역사를 자랑하는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대한 위대한 헌사다. 특히 3장 전체를 할애해 노트르담의 건축과 실내장식, 중세 파리의 도시구조에 대해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또 다른 걸작 ‘레 미제라블’에서 기술한 파리의 하수구 묘사와 비교되곤 한다.

15세기까지 파리는 가톨릭 주교가 관할하는 시테섬, 대학 총장이 책임지는 센강 좌측 대학 구역, 정부행정기관이 담당한 강 우측 행정구역 등으로 나뉘었음을 알 수 있다. 시테섬과 노트르담 대성당 담장을 경계로 파리 시민의 삶이 나뉜 것이다. 성스러움과 속세, 아름다움과 추함, 전통과 변화라는 이분법 구도를 절묘하게 활용한 작품이다.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앤서니 퀸 주연의 영화 ‘노틀담의 꼽추’ 포스터. [사진 위키피디아]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앤서니 퀸 주연의 영화 ‘노틀담의 꼽추’ 포스터. [사진 위키피디아]

“건축은 시대의 새로운 정신”이라는 언급처럼, 노트르담을 통해 중세 문화에 대한 뜨거운 사랑, 시간과 함께 사라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작품 속에 녹여냈다. “본디 노트르담 정면에 있었던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오늘날 사라져 버리고 없다”고 한 대목이나 “15세기에는 있었지만 오늘날 사라지고 없는 것, 바로 그 시절 성당 종루에서 한눈에 들어왔을 파리의 전망”이라는 묘사가 그렇다. “나는 장식가로 태어났으나 천직을 놓쳤다”고 탄식했을 정도로 위고는 실내장식과 건축에 수준급 전문가였다. 훗날 나폴레옹 3세 때문에 17년 동안의 길고도 고독한 망명 생활에서 그를 지탱시켜 준 것이 바로 ‘글쓰기와 와인, 실내장식’ 세 가지였다.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있는 건지섬의 ‘오트빌 하우스’에서 위고의 또 다른 재능인 실내장식을 확인할 수 있다.

2019년 4월 15일 화재가 일어나기 전, 노트르담은 인기 관광지였다. 입구에선 원색 옷과 특이한 용모의 여인들이 관광객들에게 구걸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집시족이다. 유럽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질 집단이지만 작가는 집시를 매력적인 캐릭터로 바꿔놓았다. 교수형 집행 직전 콰지모도가 종탑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에스메랄다를 구출한 뒤 성당 안으로 도망쳐 와인을 건넨다는 설정은 독자를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영화와 뮤지컬, 오페라로 수없이 리메이크된 장면이다. 작품 막판에서 에스메랄다가 좋아했던 남자 이야기를 전하면서 냉소적 유머를 던지는 것도 흥미 포인트다. “페뷔스 드 샤토페르 역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결혼을 한 것이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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