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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범들의 '부적' 됐다…롤스로이스男 '석방' 시킨 이 처방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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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경찰 로고. 연합뉴스

경찰 로고. 연합뉴스

일부 마약 투약자들이 향정신성의약품(향정)이 포함된 병원 처방전을 지니고 다니며 수사를 회피해 현장 경찰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간이 시약검사에서 마약 양성 반응이 검출되더라도 같은 성분의 의약품을 처방 받은 기록이 있을 경우 수사 기관이 즉각 석방한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5월 30일 서울의 한 경찰서는 30대 남성 A씨를 마약류관리법 위반으로 체포한 뒤 한 차례 석방하는 해프닝을 겪었다. 마약 투약 첩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A씨를 상대로 필로폰 간이시약 검사를 했고, 양성으로 나왔다. 그러나 A씨는 “다이어트 약물을 처방받고 있다”며 처방전을 제시했다. ‘판베시’라는 이름의 펜터민 계열 식욕억제제를 복용했다는 게 A씨 주장이었다. 결국 경찰은 A씨를 석방하고 3주 동안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검사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3주 뒤 국과수는 정밀 검사결과 A씨가 필로폰(메스암페타민)을 투약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통보했다. 경찰은 A씨를 재추적해 체포했고, 7월 26일 마약류관리법위반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송치했다. 사건을 수사한 경찰 관계자는 “최근 향정 처방전을 부적처럼 들고 다니며 악용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며 “간이 시약검사로 걸러내지 못하는 비슷한 류의 향정 처방전을 제시하면 석방할 수밖에 없는데, 한 번 도망가 버리면 추후에 마약 투약 사실이 확인되고 나서 신원 확보를 못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향정신성의약품을 투약한 채 롤스로이스 차량을 몰다 행인을 치어 중상을 입힌 20대 남성 A씨가 지난 8월 18일 오전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서울 강남구 강남경찰서에서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뉴스1

향정신성의약품을 투약한 채 롤스로이스 차량을 몰다 행인을 치어 중상을 입힌 20대 남성 A씨가 지난 8월 18일 오전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서울 강남구 강남경찰서에서 호송차로 향하고 있다. 뉴스1

지난 8월 2일 서울 신사동에서 신모(27)씨가 마약류 성분에 취한 채 운전을 하다 길을 걷고 있던 20대 여성을 차로 친 ‘롤스로이스 사건’에서도 신씨의 석방 여부가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신씨는 사건 발생 직후 간이 시약검사에서 마약 양성 반응이 나왔지만, 피부과 처방전이 있다고 주장해 석방됐다. 실제로 신씨는 피부과에서 진료를 받은 것으로 확인됐으나 이전에 신씨가 마약 투약 전과가 있다는 점과 교통사고로 인해 피해자가 심하게 다쳤다는 점 때문에 석방이 적절했느냐는 논란이 제기됐다.

향정 처방전을 수사 회피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건 법의 사각지대를 노린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현행법상 현장에서 마약 현물이 발견되거나 투약 행위가 발각되는 경우가 아니면 즉각 강제수사에 나서기 어렵다. 간이 시약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더라도 마약의 종류·양을 정확하게 잡아내지 못해 증거 능력으로 인정되는데 한계가 있다. 그러다보니 처방전을 제시하면 경찰 입장에선 일단 석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이 계속될 가능성을 우려했다. 윤흥희 한성대 마약알콜학과 교수는 “최근 마약사범들은 간이검사를 피하기 위해 의약품과 비슷한 형태로 마약을 변형해 팔기도 한다”며 “간이 검사 결과만으로는 피의자로 볼 수 없으니 매번 영장을 받아야 하는데, 그래서 마약 수사가 어려운 수사로 분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약수사를 오랫동안 해온 한 수사관은 “그래도 최근에는 정부 차원에서 마약 단속을 강조하면서 마약 검사를 위한 신체 압수수색영장이 수월하게 나오는 편”이라면서도 “최근 향정이 워낙 많이 유통되고 있어 처방전이 악용될 소지가 크다”고 말했다.

병원의 향정 처방량은 증가하는 추세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해 의료용 마약류를 한 번이라도 처방받은 환자는 1946만명으로, 전체 국민 2.6명 중 1명이 의료용 마약류를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관련 통계 수집이 시작된 2018년 이후 역대 최다 수치다. 2019년 9967만 7125건수였던 의료용 마약류 처방 건수는 2022년 1억 242만 4505건으로 늘어났다. 의료용 마약류 처방량도 2019년 16억 8224만 6346건에서 매년 증가해 2022년 18억 7359만 7537건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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