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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귀병 아이들에 3000억, 감염병 정복 7000억…절망 치료한 기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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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9일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1층에 고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김종호 기자

29일 서울대병원 어린이병원 1층에 고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 회장의 흉상이 설치되어 있다. 김종호 기자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은 기업의 사명 중 하나로 “인류의 건강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제시했다. 2010년 사장단 회의에서의 일이다. 그 발언이 유지가 돼 유족은 2021년 5월 건강을 위한 분야에 1조원을 기부했다. 그중 7000억원이 감염병 예방 인프라 구축에 쓰인다. 국내 최초의 감염병 전문병원인 중앙감염병병원(150개 병상) 건립에 5000억원이 들어가고 2000억원은 국립감염병연구소 건립과 연구 지원에 쓰인다. 3000억원은 소아암·희귀질환 퇴치와 연구 지원에 사용된다.

 코로나19로 3년여 동안 세계에서 691만명가량이 목숨을 잃고, 팬데믹이 6년 주기로 온다고 알려진 시대에, 한국 의료계의 역동적인 ‘반격’이 그의 기부에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명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이 전 회장의 기부는 국가가 못하는 부분을 민간이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속도가 더딘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정부의 의사 결정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있다. 중앙감염병병원은 2026년 4월 착공해 2028년 말 문을 연다. 연구소는 최근 서울 종로구 서울대 의대 부지에 짓기로 결정했으나 연구 지원은 아직 시작도 안했다. 오 교수는 “기부금이 온지 2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 성과를 못 내고 있다. 더디게 가고 있어 다음 팬데믹 전에 개원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했다.

 기부금의 많은 부분이 어린이를 향한 것도 이 전 회장이 생전 “어린이는 미래의 희망”이라고 강조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는 1호 삼성어린이집 개원 때 “진작 하라니까”라고 아쉬움을 나타냈고, “모서리가 각지면 안 된다”거나“급식 칼로리가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뜻이 소아암·희귀질환 기부로 이어졌고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다. 희귀질환 중에는 세계 환자가 10명도 안 되는 정말 희귀한 병이 있다. 국내외 전문가와 데이터 등이 총동원돼야 하는 엄두도 못 낼 일을, 이 전 회장의 기부금이 가능하게 한다.

 서울 성북구에 사는 교사 김모(32)씨는 2021년 4월 병명이 뭔지도 모른 채 생후 100일이 안 된 솔이를 떠나보냈다. 서울대병원 채종희 교수팀이 1년 8개월 노력 끝에 병명을 밝혀냈다. ‘뇌량 무형성증 및 뇌이랑비대증’이라는 병이다. 그 결과를 찾는데 기부금이 쓰였고, 김씨는 다시 희망을 갖게 됐다. 채 교수는 김씨에게“원인을 찾았으니 둘째를 가져보자”고 제안했다.〈중앙일보 8월 31일 자6면〉 9월 임신에 성공한 김씨는 18일 “산부인과 검사받으러 갈 때마다 설렌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기뻐했다. 그는 13주차에 유전자에 문제가 없는지를 검사할 예정이다.

 원인 모를 질병에 맞닥뜨렸던 많은 아이와 그 가족이 수백만 원의 비용이 드는 첨단 유전체 검사, 미세 잔존암세포 검사 등을 무료로 지원받아 희망의 빛을 찾았다. 1177명의 희귀암과 335명의 소아암 진단, 2984건의 소아암·희귀질환 관련 연구가 가능했다. 155개 의료기관의 연구진 1059명이 그 일에 몰두할 수 있다. 앞으로 10년간 소아암 1만2000명, 희귀질환 5000명이 기부금의 도움을 받게 된다.
 소아암 표준치료법이 나오면 지방 환자가 수도권으로 오지 않아도 돼 지방 의료 공백 해소에 일조하게 되고, 한국은 희귀질환 퇴치와 연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게 서게 된다는 게 의학계의 평가다. 채종희 교수는 “불확실성으로 힘들어하는 많은 어린이 희귀질환 아이와 가족이 건강한 아이의 출산을 꿈꾸게 됐다. 이번 경험을 토대로 세계 미진단 환자의 질병 확인과 연구를 진행해 글로벌 임상연구의 중심이 될 기회를 맞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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