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시작한 지난 7일 동틀 무렵(현지시간). 이스라엘과 5시간의 시차가 있는 싱가포르에서는 190개국 청소년들이 한자리에 모인 축제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이날 싱가포르 엑스포 전시관에선 ‘2023 퍼스트 글로벌 챌린지’가 개막했다. 참가자만 1000명이 넘는 세계 최대 로봇 경진대회다. 중·고등학생들로 이뤄진 각국 팀들은 저마다 대형 국기를 휘날리며 환호와 박수갈채 속에 입장해 마치 올림픽을 연상시켰다. 한국에서도 12명의 고등학생이 참가했다.
미국의 비영리단체 ‘퍼스트 글로벌(FIRST Global)’ 창립자인 딘 케이먼은 2개의 바퀴로 균형을 잡는 전동 휠체어 ‘아이봇(iBOT)’과 전동 킥보드의 원조 격인 ‘세그웨이’를 개발한 주역이다. 그는 중앙일보와 만나 “세계 각국의 아이들이 STEM(과학·기술·엔지니어링·수학) 분야에 관심을 갖고 이 지식으로 세계가 직면한 공통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 싶었다”며 대회 운영 취지를 설명했다.
7년 차를 맞는 올해 대회는 세계 3대 반도체 장비 기업인 램리서치가 2025년까지 1000만 달러(약 135억원)를 후원하기로 하면서 큰 힘을 받게 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만드는 최첨단 반도체에 램리서치의 장비가 사용되기 때문에 한국과의 협력도 활발하다.
올해 대회의 주제는 ‘수소 지평선(Hydrogen Horizons)’이다. 참가자들은 경기장 중앙에 모아놓은 작은 공(수소)과 큰 공(산소)을 추출하는 로봇을 만든다. 그런 다음 물 분자에서 수소와 산소를 떼어내듯 크기에 따라 공을 분류하고 각각 탱크에 저장한다. 수소 탱크가 채워지면 로봇이 수소를 산소 탱크로 운반해 사용 가능한 에너지로 변환시킨다. 포집한 수소를 산소와 반응시켜 전기와 열에너지를 얻는 원리를 구현한 셈이다.
흥미로운 건 로봇대회의 핵심이 ‘승리’가 아니라 ‘협력’이라는 점이다. 각국팀은 무작위로 다른 나라팀들과 모여 더 큰 팀을 이루면서 계속 협력 범위를 넓혀 나간다. 에너지 개발을 상징하는 공의 개수도 중요하지만, 서로 다른 국적팀과 얼마나 활발히 협력했는지, 협력을 통해 더 나은 혁신을 이뤘는지에 따라 가산점이 주어진다. 개인이나 단일팀이 경쟁해 1등을 차지하는 경진대회나 해커톤과는 점수를 얻는 방식 자체가 다른 것이다. 케이먼은 이를 협력(Cooperation)과 경쟁(Competition)을 합쳐 ‘코퍼티션(COOPERTITION)’이라고 표현했다.
실제 학생들은 활짝 열린 부스를 자유롭게 오가며 기꺼이 서로를 도왔다. 캐나다팀이 한국팀 로봇의 필터 기능을 보러 오고, 베네수엘라 팀이 자신들의 리프팅(승강) 기술을 베트남팀에게 알려줬다. 때로는 한 시간 넘게 구석에 앉아 아이디어를 의논하기도 했다. 노력해도 로봇 기술이 뒤처지는 팀은 인간(학생)이 직접 공을 던지며 힘을 보탰다.
한국팀의 방현진(18)군은 “미래 세대가 맞닥뜨린 문제는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협업해서 더 나은 방법을 고안하는 게 중요하다”며 “이 대회는 전체가 이기려면 서로 협동해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 주는 현실의 축소판”이라고 말했다.
나흘간의 대회 동안 학생들도 속속 전해지는 전쟁 소식을 들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팀은 고향의 가족 걱정은 물론, 항공편이 결항하거나 축소돼 당장 예정대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 와중에도 비행기만 3번을 갈아타고 일주일에 걸쳐 도착한 소말리아팀과 전쟁 중에 특수부대의 엄호 속에 도착한 우크라이나팀, 시리아 난민 청소년들로 꾸려진 191번째 ‘희망(HOPE)팀’을 격려하는 인간애를 보였다.
릭 가초 램리서치 부사장은 “세계 곳곳에서 어른들은 갈등이 심한데, 아이들은 이렇게 서로 도우려 한다. 내년에 열리는 로봇대회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담과 함께 열어 글로벌 리더들에게 청소년들이 어떻게 협력하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