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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윤 대통령이 달라져야 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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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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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에는 K읍의 ‘사형제 이야기’가 등장한다. 투숙객들의 재물을 탐낸 여관 주인은 네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인다. 원귀(冤鬼)들은 자식이 없는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준다. 그리고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차례로 불귀(不歸)의 객(客)이 된다. 지극했던 사랑을 회수하는 방식으로 처절한 복수를 완성하는 전복적 서사(敍事)다. 중도·청년·중산층이 여권에 등을 돌린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결과는 1년7개월 전 지지했던 윤석열 정권에 대한 경고였다. ‘사형제 이야기’ 속 아버지의 상실감을 여권은 제대로 느끼고 있을까.

보선 결과는 민심의 정권 경고
방향 맞지만 태도 오만해 실망
언로 막히면 ‘벌거벗은 임금님’돼
겸손한 자세로 민심 경청하길

17%포인트 차 대패는 여권의 자업자득이다. 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김태우 전 구청장을 사면하고, 보궐선거에 원인제공자를 출마시키는 ‘용산’의 결정에 그 누구도 “아니되옵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구청장 한 사람을 뽑는 선거가 ‘윤석열 대 이재명’의 대선 2라운드가 돼버렸다. 집권당은 출석 점검까지 하는 총력전을 벌였다. 어느 당협위원장은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선거 현장에 하루만 가고도 수일간 간 것처럼 옷을 갈아입고 인증샷을 올렸다. 유권자를 바보로 아는 소극(笑劇)이었다. 직장인들은 퇴근길에 ‘분노투표’까지 했다.

유권자들이 마음을 닫은 것은 집권 이후 1년5개월 동안 보여준 정권의 오만한 태도 때문이었다. 사실 노동·교육·연금 개혁, 한·미 동맹 강화, 한·일 관계 개선 등 정책 목표와 방향은 잘 잡았다. 그러나 국민 설득이 부족했고, 야당과의 소통은 아예 없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기자회견도 안 하고 있다. 일방통행의 독주만 있었다.

그러는 동안 만 5세 입학, 주 69시간제, 수능 킬러문항 소동이 벌어졌다. 내로남불이 아닌 공정과 상식을 기대했는데 자질과 도덕성이 함량 미달인 인사들을 줄줄이 기용했다. 국회 인사청문회 도중 장관 후보자가 걸어 나가는 최악의 장면까지 나왔다. 이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국민이 주인이다. 그런데 머슴이 주인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 “나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다. 살아 있는 권력에 굽히지 않는 강골 검사였다. 그래서 대통령이 됐으면 참모들에게도 그런 결기를 허용하고 언로(言路)를 열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가 충정에서 쓴소리를 했더니 “왜 너까지 나를 힘들게 하느냐”는 반응이 돌아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반대였다. 참모들과 ‘계급장 떼고’ 격의 없이 토론했다. ‘검사와의 대화’ 때 평검사들이 무례하게 대들었지만 누구에게도 인사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민주주의의 생명줄인 언로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촌로(村老)를 상대할 때도 정성을 다했다. 시시한 얘기에도 박장대소하고 맞장구쳤다. 생전의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단 둘이 국정을 의논할 때는 깜짝 놀랄 정도로 치밀한 계산으로 나를 다그쳤는데 국민을 대할 때는 무장해제하고 푸근한 동네 아저씨가 되어 경청했다”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을 만난 사람들은 “내가 이렇게 똑똑한 사람인 걸 알게 해준 분”이라며 호감을 표시했다. 윤 대통령도 국민을 하늘같이 섬기면 순수한 성정과 결단력에 더해 날개를 달 것이다.

여권은 지금 각자도생의 분위기다. 비관적인 수도권 총선 예측 여론조사 결과를 보여주자 지도부는 “나는 안 본 걸로 해 달라”고 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내 지역구 영남은 아무 문제가 없으니 그저 ‘윤심’을 거스르지 않고 공천만 받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렇게 영남과 보수만 바라보면 내년 총선에서도 수도권과 중도를 몽땅 내주고 참패하게 된다. 정권은 절뚝거리는 레임덕(lame duck)이 아니라 아예 죽어 있는 데드덕(dead duck)이 될 것이다. ‘사형제 이야기’ 비극의 진짜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윤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서 교훈을 찾아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를 추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변화와 쇄신의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처럼 내부 비판과 언로가 계속 막힌다면 아부꾼의 심기경호에 길들여진 ‘벌거숭이 임금님’이 될 것이다.

하지만 국정 운영 방식을 바꾸면 보선 참패는 전화위복이 된다. 이념 대통령이 아니라 민생과 경제를 챙기는 실용 대통령이 돼야 한다. 범부(凡夫)의 고달픈 현실을 어루만지기 위해 지상에서 가장 겸손한 표정으로 경청해야 한다. 저절로 내부 통합이 될 것이다. 첨단 방공망과 막강한 정보기관을 갖고도 게릴라 집단 하마스에 일격을 당한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다. 사사건건 발목만 잡고 내분 상태인 거대 야당과 맞서 총선에서도 이길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대통령의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지혜의 왕’ 솔로몬도 만년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탄식했다. 행여 권력에 취할까 봐 자신을 경계하고 민심을 향해 직진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