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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단색화 거장' 박서보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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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2021년) 서울 연희동 작업실의 박서보 화백.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년 전(2021년) 서울 연희동 작업실의 박서보 화백.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언젠가 내가 떠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떠날) 준비하는 게 즐겁다." 

몇 년 전부터 이렇게 되뇌었던 구순(九旬)의 화가는 가을이 깊어가는 계절에 그 길을 떠났다.

'묘법' 연작 독보적 세계 구축 #장학재단 설립 등 사회 기여 #제주 박서보미술관 내년 완공돼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본명 박재홍) 화백이 14일 오전 타계했다. 향년 92세. 2021년 3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다가올 때를) 행복하게 받아들이겠다"며 "하지만 현세에서 더 건강하게 그림을 그리다 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 지난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던 그는 최근까지도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묘법, 나를 비우는 수행(修行)"

박 화백은 한국 현대 추상미술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1956년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을 식민잔재로 규정하며 반(反)국전 운동에 앞장서며 1960년대 한국 미술계의 중심에 자리했다. 1962년 이후 홍익대 미술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1986~1990년 미술대학장을 지냈다.

1960년대 중반까지는 전후 한국의 어둡고 격정적인 정서를 담은 앵포르멜(Informel) 계열의 표현추상회화를 그렸으나 1960년대 중반 이후 그를 대표하는 '묘법(描法·Ecriture)' 연작을 시작하며 독창적인 세계를 다져갔다.

그의 '묘법'은 1966년 무렵 아들의 서툰 글쓰기에서 영감을 받아 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묘법이란 캔버스에 유백색의 밑칠을 하고 채 마르기 전에 연필로 수없이 반복되는 선을 그어가는 기법을 말한다.

박서보, 묘법 no-37-73-1973-1. 2021년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에 전시된 작품이다. [사진 기지재단]

박서보, 묘법 no-37-73-1973-1. 2021년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에 전시된 작품이다. [사진 기지재단]

박서보, 묘법 No.01-77,1977, 르몽드지에 연필과 유채, 33.5x50㎝, 작가 소장[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박서보, 묘법 No.01-77,1977, 르몽드지에 연필과 유채, 33.5x50㎝, 작가 소장[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묘법은 그에게 회화 기법 그 이상의 의미였다. 당시 세 살이었던 둘째 아들이 공책에 글을 쓰며 종이가 구겨지고 찢어질 때까지 애쓰며 반복적으로 그리고 지우는 모습에서 창안했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당시 묘법을 시작한 계기에 대해 "한국적인 회화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시절, 내 작품을 하려면 나를 완전히 비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캔버스가 내게 수신(修身), 수행(修行)을 위한 도구가 돼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반복적인 그리기와 지우기 행동이 도 닦는 행위, 즉 수행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1973년 도쿄 무라마쓰 화랑에서 첫 묘법을 선보인 이래 50여 년간 작업을 지속해왔다. 초기 ‘연필 묘법’ 후에는 1982년 닥종이를 재료로 사용해 한지를 발라 마르기 전에 긁고 밀어붙이며 ‘지그재그 묘법’이 시작됐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막대기나 자와 같은 도구로 화폭에 고랑처럼 파인 면들이 만들어졌다. 2000년대 들어서는 유채색 작업으로 또 한 번 크게 변화했다.

80대 중반에 찾아온 명성  

2021년 중앙일보와 인터뷰 당시 박서보 화백의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21년 중앙일보와 인터뷰 당시 박서보 화백의 모습.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그의 작품이 해외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뜨거운 러브콜을 받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 전부터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정창섭 등이 참여한 ‘한국의 단색화’ 전이 큰 계기가 됐다. 이후 그는 2016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런던 화이트큐브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어 '완판' 기록을 냈으며, 이후 파리 페로탕갤러리와 독일 노이스 랑엔파운데이션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또 지난해 4월 말 세계적인 예술서적 출판사 리졸리(Rizzoli)는 영문 모노그래프 박서보:『묘법(Park Seo-Bo: Ecriture)』을 발간했다. 또 지난 6월 뉴욕타임스는 '한국의 거장, 자신의 유산을 세상에 남기려 하다(A Towering Figure in South Korean Art Plans His legacy)'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그의 작품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고향에 미술관 건립 꿈은 무산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박서보 회고전 전시장 전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 박서보 회고전 전시장 전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후학 양성을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실현해가는 면모도 보였다. 2019년 기지재단(이사장 박승호)을, 2022년 박서보장학재단(이사장 배순훈)을 설립했다. 기지재단은 박서보미술관과 기념관 건립 관련 일을 맡고, 장학재단은 올부터 홍익대 미술대학 재학생을 선발해 지원한다. 그는 또 자신의 이름을 딴 '광주비엔날레 박서보 예술상' 신설을 추진했지만, 지난 5월 예술인들의 반발로 첫째 수상자만 내고 폐지됐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관변 예술단체 간부를 지낸 점에 대해 지역 미술계와 청년 작가들이 반대한 것이다.

한편 그는 자신의 고향인 경북 예천에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관 건립하기를 간절히 꿈꿨으나 이는 끝내 이루지 못했다. 박 화백은 지난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예천군에 시대별 내 작품 변화를 보여줄 대표작 120점을 기증하고 싶다"며 "설계는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했으면 좋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여러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해 무산됐다.

대신 제주 서귀포시 호근동 JW 메리어트 제주 부지에 그의 이름을 딴 '박서보 미술관'(가제)이 내년 완공을 목표로 건축 중이다. 설계는 스페인 건축가 페르난도 메니스(72)가 맡았으며, 미술관은 지상 1층, 지하 2층 (전시관 면적 900㎡) 규모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해 JW 메리어트가 대지와 부지를 소유·건립하고, 기지재단이 프로그램을 기획해 전시하는 일종의 '전시관'이어서 아쉬움을 남긴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박서보 화백의 서울 연희동 작업실 모습. 이 공간은 건축가 조병수가 설계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서보 화백의 서울 연희동 작업실 모습. 이 공간은 건축가 조병수가 설계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편 박 화백은 60여 년 간 이어온 단색화 그림에 자부심이 강했다. NFT 열풍 속에도 고인은 "내 그림 자체가 대체불가능한 것"이라며 "누구도 내 작품 이미지를 NFT(Non fungible Token·대체불가능토큰)라는 이름의 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거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2009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이후, 심근경색과 뇌경색, 그리고 최근 폐암 진단을 받으며 몇 차례의 위기를 맞은 그는 자신의 마지막 자리를 직접 준비했다. 2년 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분당 메모리얼 파크에 내가 있을 자리(납골묘)를 준비했다. 내 좌우명으로 비문(碑文)도 준비했다"고 밝혔다. 그가 자신의 비석에 새겨 넣은 글귀는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변화해도 추락한다"이다.

그는 이에 대해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라며 "그런데 잘못 변화해도 추락한다.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변화는 오히려 작가의 생명을 단축한다. 그걸 경계하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명숙 씨와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은 오는 17일 오전 7시, 장지는 분당 메모리얼 파크이다. 02-2072-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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