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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두 장 뿐인 사진…총 든 구한말 의병들, 그 촬영지 찾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07년 9월25일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기자 프레드릭 아서 매켄지가 촬영한 한말 무장의병 사진. 매켄지 일행은 당시 서울로 가려고 양평읍내를 떠난 뒤 일본군으로 오인 받아 의병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위기를 모면한 뒤 이들 중 일부를 세워놓고 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양평의병기념사업회

1907년 9월25일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기자 프레드릭 아서 매켄지가 촬영한 한말 무장의병 사진. 매켄지 일행은 당시 서울로 가려고 양평읍내를 떠난 뒤 일본군으로 오인 받아 의병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위기를 모면한 뒤 이들 중 일부를 세워놓고 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양평의병기념사업회

“우리는 어차피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보다는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2018년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마지막 장면. 장엄한 대사와 함께 구한말 의병을 재현한 배우들의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1907년 9월 영국 일간지 데일리메일의 기자 프레드릭 아서 매켄지가 촬영한 사진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구한말 무장 의병 사진은 매켄지가 당시 찍은 두 장이 전부다.

양평의병기념사업회가 특정한 매켄지 한말 무장의병 사진 촬영지 인근. 왼쪽부터 향토사학자 최봉주씨와 이복재씨, 신영렬 사업회 회장, 의병장 이백원의 외고손녀 하보균씨,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한국향토사연구전국연합회 이사장. 손성배 기자

양평의병기념사업회가 특정한 매켄지 한말 무장의병 사진 촬영지 인근. 왼쪽부터 향토사학자 최봉주씨와 이복재씨, 신영렬 사업회 회장, 의병장 이백원의 외고손녀 하보균씨,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한국향토사연구전국연합회 이사장. 손성배 기자

경기도 양평군은 양평의병기념사업회(회장 신영렬) 소속 향토사학자 이복재(71)씨와 최봉주(72)씨가 이 사진의 촬영지를 역사·지리학자와 영상전문가의 검증을 거쳐 찾아냈다고 13일 밝혔다. 당초 사진 촬영지는 양평군 옥천면 아신리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수십번을 찾아가 살펴봐도 도무지 촬영지와 비슷한 곳을 찾을 수 없었다”는 향토사학자 이복재씨 등은 추가 조사를 통해 양평군 오빈리 일대가 매켄지의 의병 사진 촬영지라고 결론 내렸다.

단서가 된 건 매켄지가 남긴 사진 두 장과 그가 1908년 발간한 저서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이었다. 저서와 일본 ‘조선폭도토벌지’ 등 학계의 연구 자료를 종합하면 매켄지는 1907년 9월 양평 양동면(23일), 양평읍내 숙소(24일) 등을 거쳤다. “(25일)아침 서울로 출발해 얼마 못 가 바위와 모래가 깔린 강변에 이르러 의병 부대와 만났다. 일본군으로 오인당해 기습을 받을 뻔했다가 위기를 모면하고 의병들을 일렬로 세운 뒤 사진을 찍었다”는 내용이 매켄지 기록에 남아있다.

이복재씨 등은 이 기록을 토대로 2019년부터 4년에 걸쳐 매켄지의 이동 경로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씨는 “반 미친 사람처럼 혼자서 매켄지 사진을 인쇄한 다음 계속 남한강 강가를 따라 산만 쳐다보며 돌아다녔다”며 “4년을 돌아다닌 끝에 오빈리 덕구실마을 뒷산에서 사진과 딱 맞는 능선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후 사진·영상 판독 전문가,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역사학자들과의 현장 답사와 검증을 통해 매켄지 무장 의병 촬영지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양평군 역시 이씨의 주장과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오빈리를 매켄지 촬영지로 알리기로 했다. 양평군 관계자는 “이전까진 양평읍에서 양수리 가는 길에 사진을 찍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아신리로 추정해왔다”며 “향토사학자가 사진을 들고 지형을 하나 하나 대조해 능선과 봉우리까지 다 맞춰와 군에서도 오빈리를 촬영지로 공식화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양평군은 의병 사진의 능선이 보이는 곳에 표지석 또는 의병 사진을 설치할 계획이다.

양평의병기념사업회 소속 향토사학자 이복재(오른쪽)씨가 매켄지가 촬영한 한말 무장의병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손성배 기자

양평의병기념사업회 소속 향토사학자 이복재(오른쪽)씨가 매켄지가 촬영한 한말 무장의병 사진을 설명하고 있다. 손성배 기자

 기념사업회는 매켄지의 저서에 등장한 것으로 추정되는 무명 의병의 묘도 찾았다. 양평 옥천리의 한 마을 주민이 산책로를 내기 위해 산을 오르던 중 40년 이상 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묘비석을 발견해 양평군에 제보를 했다. 이후 기념사업회가 찾은 묘비석엔 “1907년(정미년) 8월 17일(양력 9월25일)에 남산에서 숨진 이백원 의병장의 묘”라고 쓰여 있었다. 매켄지 저서에 24일 밤 의병 전사자 2명이 발생했다는 내용이 남아있는 만큼, 기념사업회 측은 묘비석의 주인이 책에 등장하는 이와 동일한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지난해 무명의병포럼의 ‘잃어버린 무명의병을 찾아서’ 보고서 작성을 총괄한 강진갑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은 일본 조선주차군사령부의 기록 등을 통해 1906년~1911년 의병 전쟁에서 숨진 전사자를 1만7779명로 추산하고 있다. 강 원장은 “1895년 을미의병부터 1905년 을사의병, 1907년 정미의병을 거쳐 나라를 빼앗긴 이후인 1913년까지 의병 전쟁이 이어졌다”며 “이름을 남기지 않고 전사하거나 순국한 무명 의병의 헌신을 우리가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을 지금이라도 시작해야 한다”고 했다.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기자 프레드릭 아서 매켄지가 1907년 9월24일 저녁 무렵 경기 양평읍내에 들어와 최초로 의병들을 만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양평의병기념사업회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기자 프레드릭 아서 매켄지가 1907년 9월24일 저녁 무렵 경기 양평읍내에 들어와 최초로 의병들을 만나 찍은 사진이다. 사진 양평의병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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