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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 불시착한 우주인’ 한복에 홀리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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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호 19면

이방인이 본 한복

K-컬처의 세계적 인기 덕분에 해외 명품 브랜드들의 한복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졌다. 지난 5월 서울 경복궁에서 펼쳐진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의 ‘2024 크루즈 패션쇼’에선 한복 옷고름을 연상시키는 리본 장식의 드레스와 슈트를 비롯해 우리의 전통색인 오방색을 활용한 의상들이 대거 등장했다.

우리에게 한복은 너무나 익숙한 전통의상이다. 그래서 한복의 요소들을 현대의상에 차용하면 오히려 낯설다. 그래서 궁금하다. 외국의 패션 디자이너들은 한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저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이색적인 옷일까, 아니면 한복에서 진짜 세계인의 눈을 홀릴 만한 아름다운 요소를 본 것일까.

10월 7일부터 11월 13일까지 코오롱스포츠 한남점에서 열리는 전시 ‘어크로스 더 워터(ACROSS THE WATER)’가 그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코오롱스포츠가 영국의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후세인 살라얀과 함께 기획한 전시로 미디어 아트 작품들과 더불어 다운재킷(패딩점퍼)·베스트·니트·팬츠 등 총 29종의 협업 제품을 선보이는 자리다. 아우터의 경우 저고리·마고자·두루마기 등 한복에서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것이 특징이다.

코오롱스포츠와 협업, 29종 제품 공개

‘패션계의 철학자’로 불리는 영국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후세인 살라얀. 그는 인문학부터 최첨단 과학기술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패션의 미래 개념과 새로운 가능성을 연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박종근 기자

‘패션계의 철학자’로 불리는 영국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후세인 살라얀. 그는 인문학부터 최첨단 과학기술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패션의 미래 개념과 새로운 가능성을 연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박종근 기자

이 협업이 유독 기대되는 이유는 후세인 살라얀의 특별한 이력 때문이다. ‘패션계의 철학자’로 불리는 그는 인류학·정치·역사·과학·회화·조각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혁신적인 패션 세계를 구축해 왔다. 그는 ‘스토리텔링 패션’의 대가이기도 한데 매번 새로운 쇼를 보여줄 때마다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이야기를 통해 패션의 새로운 개념과 가능성을 제시해 왔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한복에서 어떤 가능성을 봤을까. 지난 5일 전시를 위해 방한한 후세인 살라얀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번 전시에서도 그는 특별한 이야기를 펼쳤다. 주인공은 ‘지구에 불시착한 우주인’이다. 지구 밖에서 물(바다)로 떨어진 우주인은 한국에 닿고, 한국 문화에 잘 스며들기 위해 전통의상인 한복을 재발견하며 여러 요소들을 자신의 우주복에 연결하기 시작한다. 미디어 아트 전시 역시 우주와 자연을 이루는 4원소(물·바람·흙·불)가 테마다. 이는 자신과 협업한 브랜드 코오롱스포츠가 자연과 인간을 잇는 좋은 매개체라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지구에 불시착한 우주인’과 한복을 연결한 게 흥미롭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의 상징으로 ‘우주인’이 떠올랐다. 미래에서 온 존재지만 한국문화를 ‘재발견’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결합된 ‘유동적 시간’을 창조할 존재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한복의 여러 요소에서 영감을 얻었다.
“오래 전부터 아시아 여러 나라의 전통의상에 관심이 많았고 꾸준히 연구해 왔다. 한복도 이번 전시 이전부터 조사해 둔 자료가 많아서 낯설지 않았다.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이 상의를 여미는 옷고름, 저고리 소매의 부드러운 포물선, 치마의 A라인 곡선, 그리고 남성 바지의 여유 있는 실루엣이었고 이 요소들을 협업 의상에 많이 적용했다.”
코오롱스포츠의 기술력과 후세인 살라얀의 스토리텔링 디자인이 접목된 협업 제품. 옷고름을 연상시키는 여밈 부분 등 한복의 여러 요소에서 영감을 얻었다. [사진 코오롱스포츠·위키피디아]

코오롱스포츠의 기술력과 후세인 살라얀의 스토리텔링 디자인이 접목된 협업 제품. 옷고름을 연상시키는 여밈 부분 등 한복의 여러 요소에서 영감을 얻었다. [사진 코오롱스포츠·위키피디아]

1970년 지중해 키프로스 섬의 수도 니코시아에서 태어난 살라얀은 한 살 때 영국으로 이주했고, 부모가 이혼한 다섯 살 때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키프로스 섬은 그리스와 튀르키에 사이에서 부침이 심해 살라얀은 이후에도 계속 영국과 키프로스 섬을 오가며 살았다. 그가 영국에 정착한 것은 런던의 유명 예술대학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 진학하면서다. 그가 아시아 여러 나라의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유년 시절 겪은 정치적·문화적 정체성 혼란 때문이다.

‘LED 드레스’ 등 혁신 선봬 충격 줘

커피 테이블을 스커트로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한 후세인 살라얀의 하이테크 패션. [사진 코오롱스포츠·위키피디아]

커피 테이블을 스커트로 입을 수 있도록 디자인한 후세인 살라얀의 하이테크 패션. [사진 코오롱스포츠·위키피디아]

전통과 현대를 접목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시대에 맞게, 너무 과하지 않게 잘 녹여내는 게 관건이다. 예를 들어 최첨단 소재의 다운재킷에 옷고름을 접목했을 때 한복을 아는 사람은 바로 ‘옷고름’을 떠올리겠지만, 한복을 모르는 사람은 특별한 모양의 ‘벨트’라 여길 수 있다. 디자이너가 과거의 어떤 요소를 가져올 때, ‘사람들이 이것을 A로 봐줄까, 아닐까’ 너무 신경 쓰면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 진짜 중요한 것은 진정성 있는 연구와 전통에 대한 존경심이다.”
코오롱스포츠의 기술력과 후세인 살라얀의 스토리텔링 디자인이 접목된 협업 제품. 옷고름을 연상시키는 여밈 부분 등 한복의 여러 요소에서 영감을 얻었다. [사진 코오롱스포츠·위키피디아]

코오롱스포츠의 기술력과 후세인 살라얀의 스토리텔링 디자인이 접목된 협업 제품. 옷고름을 연상시키는 여밈 부분 등 한복의 여러 요소에서 영감을 얻었다. [사진 코오롱스포츠·위키피디아]

살라얀은 2000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21세기 가장 영향력을 떨칠 혁신가 100인’에 꼽힌 바 있다. 커피 테이블이 스커트로 변형되거나, 스위치를 누르면 치맛자락이 비행기 날개처럼 자동으로 펼쳐지거나, LED 전구들로 장식된 드레스 등 최첨단 과학기술을 활용한 하이테크 의상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평범하지 않은 하이테크 의상을 만드는 이유는.
“옷은 인체를 둘러싼 환경이고, 그 가능성을 확대시키고 싶다. 사실 프린트가 조금 달라지고, 형태가 조금 달라질 뿐 매년 반복적으로 유사한 옷들이 쏟아진다. 진짜 새로운 패션이 창조되려면 최첨단 과학기술의 힘을 빌려야 한다. 코오롱스포츠 같은 스포츠·아웃도어 브랜드들이 무게는 가볍고, 충격에는 강한 패브릭을 만들 수 있는 것도 최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얻은 결과다.”
솔직히 무대 밖에선 입을 수 없는 옷들이다.
“내가 쇼에서 보여준 하이테크 의상들은 패션의 새로운 개념과 경험을 제시하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 작품이다. 그래서 이런 쇼 의상들은 대부분 박물관에서 구매한다. 처음부터 일반 판매용이 아니라 갤러리 전시를 위해 디자인하는 경우도 많다.”
평소 즐기는 패션은.
“젊었을 때는 꽤 화려한 옷을 즐겼지만 지금은 보는 것처럼 심플한 의상을 주로 입는다. 유명 셰프가 정작 집에서는 가장 단순한 요리를 하는 것과 같다.(웃음)”
평상시 영감을 얻는 방법은.
“맛있는 음식, 좋은 대화, 그리고 다양한 문화를 즐기려고 노력한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하는 것도 좋아한다. 프랑스어·이탈리어를 배웠고 지금은 일본어와 그리스어를 공부 중이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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