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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불거진 '성의 표시용' 항공시장 개방 논란 [현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UAE의 아랍에미레이트항공 여객기. 사진 EK 홈페이지

UAE의 아랍에미레이트항공 여객기. 사진 EK 홈페이지

 '항공시장 개방이 성의 표시용?'.

 5년 전인 2018년에 쓴 기사 제목이다. 아랍에미리트(UAE) 측 항공사들이 저가 공세로 우리 항공시장을 공략하고 있는 데다 운항 횟수를 2배 이상 늘려달라고 한국 정부를 압박 중이란 내용이었다.

 당시 외교라인 등 정부 일각에서 한때 갈등설이 불거졌던 UAE에 최소한의 '성의 표시'를 해야 한다며 증편을 주장한다는 얘기도 들어 있다. 하지만 국내 항공업계에 미칠 막대한 피해 우려 때문에 증편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똑같은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2019년에 이어 4년 만에 열리는 한·UAE 항공회담(12~13일)에서 UAE 측이 집요하게 요구해온 증편이 수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UAE 측은 현재보다 2~4배의 증편을 요구한다고 알려져 있다.

 앞서 지난 1월 윤석열 대통령의 국빈 방문 이후 이뤄진 UAE 측의 40조원 투자 약속에 대한 성의 표시 차원에서라도 증편을 어느 정도 받아줘야 한다는 주장이 정부 내에서 힘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UAE 대통령의 방한 계획까지 전해지면서 증편 가능성은 더 높아진 모양새였다.

UAE의 에티하드항공 여객기. 사진 에티하드항공 홈페이지

UAE의 에티하드항공 여객기. 사진 에티하드항공 홈페이지

 UAE 등 중동항공사에 항공시장을 추가 개방하는 것에 대해 네티즌 상당수가 '가성비(가격 대비 만족도)'를 거론하며 찬성하는 분위기다. 마트에서 여러 유사한 상품 중에서 하나를 고르듯, 국적사냐 외항사냐 따질 것 없이 저렴하고 서비스 좋은 항공사를 택하면 된다는 얘기다.

 갖가지 물의를 일으켰던 대한항공 오너일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도 한몫하는 듯하다. 2018년에도 분위기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소비자 입장만 보면 타당한 얘기다. 직항 대신 다소 시간이 걸리는 환승을 하더라도 저렴하고 게다가 서비스까지 좋다면 기꺼이 구매할 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중동 항공사와 경쟁한 외국 사례를 살펴보면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호주의 콴타스항공은 유럽 노선을 여럿 운항하던 유명항공사였지만 지금은 중동 항공사와의 경쟁에 밀려 상당수 유럽 노선을 폐지했다. 중동 항공사의 저가공세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UAE의 아랍에미레이트항공(EK), 에티하드항공을 위시한 중동 항공사는 경쟁노선에선 30% 가까이 싸게 표를 팔며 자국 공항으로 승객을 실어간 뒤 다시 그곳에서 유럽과 아프리카 주요 도시로 승객을 운송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

 유럽연합(EU)에선 경쟁에 밀려 항공 관련 일자리 8만개가 사라졌다고 한다. 항공 자유화의 첨병인 미국에서조차 대형 항공사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며 “중동 항공사가 막대한 정부 보조금을 앞세워 불공정 경쟁을 하고 있다”고 반발할 지경이었다.

 우리 시장도 이미 상황은 마찬가지다. 2019년 기준으로 UAE와 한국 간 승객은 15만명이었으며, 이 중 70%를 UAE 측 항공이 태웠다. 더 큰 문제는 UAE 항공사 승객의 60~70%가 유럽·아프리카 등지로 가는 환승객이란 점이다.

 UAE 측이 추가 증편 요구에서 겨냥한 것이 바로 우리의 유럽행 승객이다. 저렴한 요금을 앞세워서 우리 항공사의 유럽 직항노선 승객을 잠식하겠다는 계산이라고 한다.

 게다가 UAE 측의 증편 요구가 수용되면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튀르키예 등 다른 중동지역 국가들도 ‘차별 금지 원칙’을 내세우며 동일하게 증편을 요구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이렇게 된다면 우리 측 유럽노선은 큰 피해를 면키 어렵게 된다.

 허브공항을 목표로 하는 인천공항 역시 타격을 피할 수 없다. 우리 항공사들이 각지에서 인천공항으로 환승객을 모아와서 다시 최종목적지로 떠나는 구조가 활성화돼야 안정적인 허브공항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환승객을 보내주는 상황이 되면 허브화는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

 또 주목해야 할 게 저렴한 요금이 계속 이어질 것이냐는 점이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중동 항공사들이 우리 국적사보다 싸게 운임을 받는 건 경쟁우위를 점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 항공사가 수익악화로 노선을 폐지해 경쟁이 사라지면 다시 요금을 올릴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실제로 항공권 비교·예약 사이트인 스카이스캐너를 보면 EK는 우리 국적기가 뜨는 인천~프랑크푸르트 노선은 160만원(왕복 기준)가량을 받지만, 우리 국적사의 직항이 없는 인천~프라하 노선은 260여만원을 받고 있다.

 일자리도 큰 걸림돌이다. 항공사가 더 어려워지면 일자리가 줄어들다. 주 7회 운항하는 노선 한 개가 폐쇄되면 1500~19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는 통계도 있다. 이는 앞선 외국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고 경쟁력 떨어지고, 구설수 많은 우리 항공사를 보호하기 위해 중동 항공사에 빗장을 계속 걸어 잠그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문을 더 열려면 보다 신중하게 이해득실과 항공산업의 피해 정도를 따져보고 결정하자는 얘기다.

 마침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여파로 UAE 대통령의 방한이 취소됐다는 소식이다. 항공시장 개방 전에 조금 더 짚어보고, 우리측 피해를 최소화할 방안을 함께 찾을 시간을 벌 수도 있는 상황이다. 자칫 성의 표시에만 매달려 다른 나라의 전철을 밟는 우(愚)는 범하질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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