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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제원의 시선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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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스포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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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계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 축구대표팀 감독이 하프타임 때 선수들의 투지를 북돋우기 위해 ‘이등병의 편지’를 틀어줬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를 듣고 선수들이 힘을 낸 결과 동메달을 따서 병역 면제를 받았다는 것이다. 과연 이 전설은 실화일까.

‘군대로이드’는 구시대의 유물
경기 즐기는 모습이 아름다워
형평성 논란 병역특례 손봐야

타임머신을 타고 2012년으로 돌아가 보자. 그해 8월 4일 런던 올림픽 축구 영국과의 8강전이 열린 웨일스의 카디프 밀레니엄 스타디움. 7만 명이 넘는 홈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은 전·후반 90분 동안 잘 싸웠다. 영국과 1대 1로 비긴 뒤 승부차기 끝에 승리를 거두자 한국 선수단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축구 종주국 영국을 꺾은 뒤 라커룸에 돌아온 선수들은 마치 우승이라도 한 듯 기뻐했다. 그 순간, 한국대표팀의 미드필더 기성용이 갑자기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음악 선곡 버튼을 눌렀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난데없이 김광석의 그 유명한 노래 ‘이등병의 편지’가 흘러나오자 라커룸엔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목청껏 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그날 음악 선곡을 맡았던 기성용에게 이 노래를 튼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강적 영국을 승부차기 끝에 꺾은 뒤 ‘자만하지 말자’는 뜻에서 이 노래를 틀었습니다. 다들 비장한 느낌으로 이 곡을 따라 불렀지요.”

결국 선수들이 ‘이등병의 편지’를 따라 부른 건 ‘이등병이 되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기성용의 극약 처방(?)이 주효한 것인지 한국은 런던 올림픽 3·4위전에서 일본을 2대 0으로 꺾고 동메달을 땄다. 올림픽 동메달이 무슨 의미인지는 누구나 안다. 대한민국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가야 하는 군대에 합법적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증명서를 받아든 것이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난 뒤에도 적잖은 대표선수들이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다. 당장 축구와 야구대표팀 선수들이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병역 특례를 받는다. 그중에는 경기에 한 번도 나서지 않고 병역 면제 혜택을 받은 경우도 있다. 금메달을 목에 건 e스포츠와 골프·바둑 대표선수들도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자 당장 국가대표팀 선수가 흘린 ‘땀의 가치’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빌보드 차트 1위를 휩쓴 방탄소년단(BTS) 멤버들도 군대에 가는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왜 군대에 가지 않느냐는 목소리가 커진다. 형평성 논란이 불거지면서 병역특례 조항을 전반적으로 손봐야 한다는 데 대해선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다. 꼭 50년 전인 1973년 만든 병역특례 조항은 더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이제 수명을 다했다는 것이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국가대표 선수들이 흘린 피와 땀의 가치를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다. 축구·야구 등의 인기 스포츠는 물론 육상이나 하키·럭비·역도 등 비인기 종목에서 묵묵히 한길을 걸어온 선수들의 노력은 제대로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21세기에도 ‘군대로이드(병역의무 면제+스테로이드)’에 의존하는 건 어색하기 짝이 없다. 라커룸에서 ‘이등병의 편지’를 부르며 파이팅을 촉구하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 (‘군대로이드’란 병역면제를 받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싸워 능력 이상의 성과를 내도록 만드는 강력한 동기부여를 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높이뛰기에 출전한 우상혁이 은메달을 딴 뒤 활짝 웃는 모습이었다. 그는 병역의 의무를 마친 뒤 지난해 9월 전역하면서 “군 생활을 하면서 엄청나게 성장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카타르의 무타즈 바르심에 2㎝가 모자라 은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벙글벙글 웃으며 “바르심과의 선의의 경쟁이 정말 재미있었다”고 했다. 노래 제목에 빗대서 말하자면 우상혁의 미소는 ‘이등병의 편지’가 아니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였다.

롤러스케이트 단체전 결승에서 세리머니를 하다 금메달을 놓친 정철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0.01초 차로 은메달에 그쳐 군 복무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시상대에서도 얼굴을 펴지 못했던 그는 경솔한 행동을 했다며 사과문까지 발표했다. 그러나 누가 정철원을 나무랄 수 있을까. 그는 우리 모두에게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평범한 교훈을 다시 한번 일깨워줬다. 그러니 스물일곱 정철원 선수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이다. 군대에 간다고 해서 세상이 끝나는 게 아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