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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다시 한 번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21세기의 한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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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산다는 것,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자세 교정 전문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선생님이 누워 있는 건 누워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없어요. 그건 누워 있는 게 아니라 몸을 널어놓은 거예요.” 제대로 눕는 자세는 힘을 뺄 대로 빼서 온몸을 내팽개쳐버리는 상태가 아니라는 거였다.

그렇군. 나는 침대에 널브러져 있기를 좋아할 뿐 누워 있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었군. 하긴, 눈 감는다고 다 자는 게 아니고, 입에 넣는다고 다 먹는 게 아니고, 말한다고 다 대화가 아니고, 비난이 곧 비판인 것도 아니고, 아첨이 곧 존경인 것도 아니고, 산다고 다 사는 게 아니고, 죽는다고 다 죽는 게 아니겠지.

개인과 조직, 국가의 생멸 닮아
과학도 아직 다 못 푼 생사 문제

독립지사 신규식 100년 전 외침
“망국의 원인은 마음이 죽은 것”

역사상 가장 잘살고 있는 우리
염치·관용·인권은 어디로 갔나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다” 소망

생각의 공화국

생각의 공화국

‘산다’는 건 무엇인가. 숨을 쉬고 있으면 다 사는 것인가. 어디까지가 살아 있는 상태인가.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심장이 뛰고 있으면 사는 것인가. 뇌가 작동하면 사는 것인가. 생존하고 있으면 사는 것인가.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많은 사람이 열악한 요양 시설에서 누워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이들은 생명을 경시하는 게 아니다. 한갓 생존에 불과한 삶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살면서 다들 한 번씩은 중얼거려보았을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다”라는 말에서, 인간은 단순한 생명 유지 이상을 바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깃덩이 이상의 삶, 의지대로 사는 삶, 보람 있는 삶, 충만한 삶, 그리하여 살만한 삶을 원한다.

‘죽는다’는 건 무엇인가. 숨을 쉬지 않으면 다 죽는 것인가. 어디부터가 죽은 상태인가. 과학자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다. 심장이 멈추면 죽은 것인가. 뇌가 작동을 멈추면 죽은 것인가. 생체반응만이 죽음을 결정하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심장만 뛰고 있으면 그것은 정녕 죽은 게 아닌가. 누군가는 멀쩡히 살아 있는데도 죽은 것과 다름없다는 판정을 받기도 한다. 그의 ‘정치 생명’은 죽었다는 판정을 받기도 한다. 아직도 아름다운 어떤 이는 자신의 젊고 아름답던 사진을 보여주며 쓸쓸하게 말했다. “이 사람은 죽었어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 건가.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생명복제 기술을 통해 거듭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자기 육신은 죽어도 자기 유전자는 자식을 통해 계속 살아간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개체로서 죽지만 그것은 인간이라는 종(種)의 영속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육신은 죽었지만 정신은 살아 있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다.

“겁쟁이는 여러 번 죽는다”

육신은 살아 있지만 영혼은 죽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 셰익스피어는 『줄리어스 시저』에서 말한다. “겁쟁이는 여러 번 죽지만, 용기 있는 사람은 단 한 번 죽는다.” 비굴해질 때 죽는다. 신조를 꺾을 때 죽는다. 정체성을 배반할 때 죽는다. 인간 이하의 짓을 저지를 때 죽는다. 영혼은 시시각각으로 죽는다. 웹툰 『겨울의 글쓰기』에서 주인공은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죽지 않아도 죽은 것처럼 사는 사람들도 있어. 삶은 죽음 이외의 방식으로도 끝장날 수 있거든.”

그렇다. 죽음 이외의 방식으로도 삶이 끝장나는 경우가 있다. 지켜온 가치가 사라졌을 때, 그리하여 그가 더 이상 ‘그’가 아닐 때,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아는 그는 죽었다고. 자신이 지켜온 가치를 버리고자 할 때 자신을 믿어주던 이들에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아는 아무개는 죽었습니다.” 누군가 태연히 당신의 죽음을 선언하기도 한다. “내가 아는 아무개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요”라며 애인이 당신을 떠난다.

“당신이 알던 나라는 죽었습니다”

이것이 어디 인간만의 일이겠는가. 조직이나 공동체에 대해서도 생멸을 말할 수 있다. 이름만 학교일 뿐 우리가 알던 그 학교이기를 멈추었을 때 말할 수 있다. “당신이 아는 그 학교는 죽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변화와 성장을 도모하던 곳이 그저 졸업장을 주고받는 곳, 돈만 소비하는 곳, 소외를 일삼는 곳, 혐오를 일삼는 곳, 존재를 부정하는 곳, 장소 아닌 ‘비(非)장소’가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학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무리 돈이 넘쳐나고 경쟁률이 높아도 그곳을 살아 있는 학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당신이 알던 학교는 이미 죽었습니다.”

이것이 어디 학교만의 일이겠는가. 나라에 대해서도 죽음을 말할 수 있다. 이름만 나라일 뿐, 사람들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곳, 비참이 창궐하는 곳, 장애인을 무시하는 곳, 동료 시민을 악마화하는 곳, 사람이 사람 취급을 하지 않는 곳. 나라의 탈을 썼을 뿐 나라 같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여전히 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무리 경제 성장을 하고 주가가 올라도 그곳을 살만한 나라 혹은 살아 있는 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당신이 알던 나라는 이미 죽었습니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오랑캐’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척화(斥和)논쟁이 벌어졌다. 충신이 읍소한다. 폐하, 저토록 강한 오랑캐에게 저항하다가는 나라가 망해 없어질 것입니다! 다른 충신이 읍소한다. 오랑캐에게 투항하는 것이야말로 나라가 망하는 일입니다! 상국(上國)으로 모시던 명나라를 버리고 오랑캐를 받드는 일이야말로 나라가 망하는 길입니다.

이렇게 말했던 이는 조선이 물리적 승패를 떠나 지켜야 할 목적이 있는 공동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물리적 생존이 위협받는 시점에서 그들은 딜레마에 봉착한다. 영혼을 죽이고 물리적 생존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물리적으로 죽더라도 영혼을 살릴 것인가.

죽더라도 영혼을 살리겠다니, 그 무슨 사치스러운 말인가. 그러나 영혼이 살아 있어야 부활을 꿈꿀 수 있다고 본 사람들도 있다. 그래야 죽어도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망해도 망하지 않을 수 있다고 믿었던 이들이 있다. 독립운동가 한용운은 노래한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마음의 죽음보다 슬픈 것 없다”

독립운동가 신규식은 1912년 한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음의 죽음보다 더 큰 슬픈 것은 없다. 망국(亡國)의 원인은 마음이 죽은 데 있다. (…) 우리 마음이 곧 대한의 혼이다. 모두 함께 대한의 혼을 보배로 삼아 소멸되지 않게 해야 한다. 각자 마음을 구해 죽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규식에 따르면, 진정한 죽음은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라 마음의 죽음이다. 마음을 잃어버린 자, 그는 과연 살아 있는 건가. 추구하던 가치를 잃어버린 자, 그는 과연 살아 있는 건가. 그런 사람은 초인이거나 짐승일 것이다. 기억을 잃어버린 자, 그는 살아 있는 건가.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은 사람은 살아 있어도 과거의 ‘그’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가 지워진 사람이 어떻게 같은 사람이겠는가.

정치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수호할만한 공적 가치를 잃어버린 공동체, 문명의 기록이 다 사라진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수장고가 파괴될 때, 시인 팔라다스는 이렇게 노래했다. ‘삶은 그저 꿈. 우리가 목숨을 부지해도, 우리가 수호해 온 삶의 방식은 죽어버리겠지.’

21세기 한국은 살아 있는가, 죽어 있는가. 신규식이 다시 살아온다면 깜짝 놀랄 정도로 한국은 살아 있다. 그냥 살아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잘 살아 있다. 한때 이곳을 식민지로 삼았던 일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경제가 발전했다. 21세기 초는 한국이 역사상 가장 잘 ‘살게’ 된 시대다. 그뿐이랴. 한국 문화가 역사상 가장 빨리 그리고 널리 퍼져나간 시대다. 세계 곳곳에서 많은 젊은이가 한국어를 제2 외국어로 배우겠다고 선택하는 시대다.

인구감소와 기후위기 경고장

동시에 한국이 죽어가는 시대이기도 하다. 과감하게 선진국을 선언하는 바로 그 시대에 파국의 서사들이 함께한다. 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다. 전 세계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다. 인구 감소를 막고자 하는 정책은 모두 실패하고 있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나라의 경제가 성장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인구가 줄어드는 나라에서는 학교도 줄이어 문을 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디 국내 사정뿐이랴. 지구의 기후 위기가 임계점을 돌파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아직도 냄비 속에서 천천히 삶아지는 개구리처럼 말하곤 한다. 점점 따뜻해지는군.

그렇다면 한국은 기후 위기로 인해 바다에 잠기거나, 인구 감소로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될 거란 말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파국의 아이러니는 파국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온다는 데 있다. 아포칼립스 장르물에서, 파국이 채 이르기도 전에 사람들은 앞다투어 먼저 죽는다. 파국을 예감하면 사람들은 공포에 질리기 시작하고,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인간성을 버리기 시작한다. 인간보다 인간성이 먼저 죽는다. 친절을 버리고, 위선을 버리고, 염치를 버리고, 돌봄을 버리고, 연민을 버리고, 관용을 버리고, 예의를 버리고, 인권을 버리고, 끝내 지켜야 할 가치를 쓰레기처럼 버린다. 바로 그렇게 삶은 죽음 이외의 방식으로도 끝장날 수 있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